서태후의 정치에 신음하는 청조
서태후의 정치에 신음하는 청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7.0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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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중흥의 리더 공친왕 제거…섭정 유지하려 동치제 후계 광서제 선택

 

청말(淸末) 50년 동안에 주요고비마다 등장하는 사람이 자희황후(慈禧皇后), 즉 서태후다.

1861년 남편인 함풍제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녀는 재빨리 옥새를 차지하고 측근 장수 영록과 공친왕, 환관 안덕해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쑤순(肅順) 등을 숙청하고 집권했으니, 이것이 신유정변(辛酉政變)이다.

그녀는 여섯 살에 불과한 아들을 황제(동치제)에 올려 놓고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함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늙은 황제국은 기사회생하는 듯 보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한다.

 

자희태후와 궁궐 사람들 /위키피디아
자희태후와 궁궐 사람들 /위키피디아

 

서태후는 청조에 모후가 섭정을 맡은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함풍제의 아우이자 동치제의 삼촌인 공친왕을 앞세웠다. 공친왕은 의정왕(議政王), 군기대신, 내무부총관대신, 외무부격인 총리아문 대신의 직함을 갖게 되었고, 서태후를 자신의 권력 기초로 삼았다. 초기에 서태후와 공친왕은 서로 의존하는 공존관계를 형성했다. 일종의 공동통치다.

공친왕은 개혁에 나섰다. 그는 전쟁을 벌일 때엔 영국에 적개심을 가졌지만 차츰 영국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숭배하고, 영국을 위시한 서양세력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집권하면서 서양을 끌어들여 군대훈련과 무기개발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고, 자력갱생을 통해 중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방향을 설정했다. 당시 유학자들이 주장하던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받아들인 것이다.

공친왕은 도광제의 여섯째 아들이자, 함풍제의 동생이며, 동치제의 삼촌이었다. 그는 두 황후의 신임을 얻은데다 서양 외교관들 시이의 지지를 얻어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만주족 군기대신 원샹(文祥)을 끌어들이고, 지방에서 태평천국 반란세력을 진압한 쩡궈판(曾國藩), 쭈어중탕(左宗棠), 리훙장(李鴻章) 등 한족 유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들은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늙은 황제국은 기사회생시키려 노력했다.

개혁파는 외국의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재건했다. 황폐한 토지를 개간하고 관계수로를 건설해 농경지를 확대했다. 또 주인 없는 농토에 피난민이나 전역 군인들에 배분했다. 농민이 주류를 이루던 농경사회에 농사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공친왕은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정부를 개편했다. 우선 총리아문(總理衙門)을 두었다. 중화사상에 천착해온 중국에는 외교부란 조직이 없었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동안 예부(禮部)가 번국에 대한 조공과 책봉에 대한 예절을 관장했다. 하지만 베이징 조약으로 막강한 물리력을 갖는 서양 국가들이 수도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하게 되자 서양의 외무부를 본따 새 조직을 만든 것이다.

멸망위기에 놓였던 청나라는 살아나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본질마저 변한 건 아니었다. 구질서는 유지되었고,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고, 사회적 인식이 따르지 못했다. 결국 중흥은 청 제국의 부활로 이어지지 못하고, 일시적 회복에 그치고 말았다. 동치중흥의 실패에도 서태후의 지나친 정치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공친왕 /위키피디아
공친왕 /위키피디아

 

공친왕이 주요 업무를 장악하면서 조정의 사람들이 그에게 집중했다. 하루에도 수백명의 관리가 그의 관저를 방문해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찾아온 방문자들은 뇌물을 가져다 주었고, 공친왕도 점점 오만해 지기 시작했다. 서태후도 그가 오만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공친왕의 친구들은 신중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들은체 하지 않았다.

권력을 공유한지 4년째 되던 1865년 한 관리가 공친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자희태후는 그 상소문을 받아들고 공친왕을 벌하려 했다. 뇌물수수, 정실인사, 당파결성, 전횡 등 죄명을 뒤집어 쒸워 공친왕의 모든 직위를 해제했다. 그러자 여러 친왕과 고관들이 나서서 황실의 화목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자희태후는 마지못해 군기대신으로 복직시켰으나, 의정왕 직함은 주지 않았다. 공친왕은 의기소침해져 정무를 게을리했다.

자희태후가 기세등등하자 태감 안덕해(安德海)가 권력을 행사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공친왕은 환관이 설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1869년 이 내시가 자희태후의 물품을 사기 위해 베이징 밖을 나갔는데, 황실 법규에 내시는 수도를 벗어날 경우 참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산둥 순무가 그를 체포해 조정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때 또다른 섭정인 자안태후(동태후)가 안덕해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자희태후가 손 쓸도 없이 그의 가장 신뢰하는 환관은 처형되었다. 자희는 이 사건의 배후에 공친왕이 있다고 보았다. 이후 공친왕은 더욱 조정 일에서 멀어졌다.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했을 때 공친왕은 프랑스의 무력을 알았기 때문에 온건노선을 폈지만 강경파들이 공친왕을 탄핵하자 서태후는 공친왕의 측근 군기대신들을 해임했다. 이때부터 공친왕은 권력에서 아예 손을 떼었다.

 

동치제의 황후 /위키피디아
동치제의 황후 /위키피디아

 

아들 동치제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친모인 서태후보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동태후를 더 따랐다. 두 태후가 서로 동치제의 황후를 추천했는데, 어린 황제는 동태후가 추천한 여성을 왕후로 맞고, 서태후가 민 여성을 후궁으로 들였다.

서태후는 자신이 후궁으로 들어가 황태자를 낳은 것을 되살려 동치제에게 자신이 추천한 궁녀와 동침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동치제는 친모의 간섭을 싫어해 황후와 후궁을 모두 거부하고 기생집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동치제는 어머니의 정치적 간섭을 피하기 위해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린 원명원(圓明園)을 대신해 이화원(頤和園)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동치제는 18732월에 친정을 시작했는데, 서태후가 섭정을 그만둔후에 평안히 지내도록 이화원을 착공하려 했다.

동치제는 오래 살지 못했다. 몹쓸 병이 걸려 서태후는 이를 기화로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동치제는 1875112일에 세상을 떠냈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이화원의 모습 /위키피디아
이화원의 모습 /위키피디아

 

동치제가 죽었을 때 황후가 임신을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서태후는 황후의 임신 사실을 쉬쉬했다. 정상적 관례라면 황후가 아기를 낳고 후임 황제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 종법에는 2대조 할머니는 섭정이 될수 없다. 자희태후와 자안태후가 섭정이 된 것은 동치제의 모후였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권세가이지만 서태후도 종법과 관례를 어기면서 섭정이 될수 없다.

그녀의 선택은 동치제의 뱃속 아기가 아니라, 동치제의 사촌 동생 짜이티엔(載湉)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후로서 섭정이 가능해 진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죽자 곧바로 27명의 친왕이 참가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짜이티엔의 선택을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1871년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황제에 오르니 광서제(光绪帝). 서태후와 동태후는 또다시 어린 황제의 섭정이 되었다.

동태후는 18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서태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동치제의 황후 효철의황후(孝哲毅皇后)는 서태후의 미움을 받아 식량을 조금씩 줄여 배급받으며 연명하다가 남편이 죽은후 두달만에 생명을 끊었다.

 


<참고자료>

연인 서태후(Imperial Woman), 펄 벅, 2007, 길산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p326~363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p414~444

Wikipedia, Empress Dowager Cixi

Wikipedia, Empress Xiaozhe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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