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정변①…캉유웨이, 변법자강운동 주창하다
무술정변①…캉유웨이, 변법자강운동 주창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7.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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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제도 개혁, 유능한 인재선발, 입헌군주제 도입 등 혁신적 제안

 

19세기말 30년 동안 청나라는 살가죽이 깎여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주요 조공국인 조선, 베트남(安南), 오키나와(琉球)가 일본과 프랑스의 수중에 떨어졌고, 대만, 신장성 이리(伊犁)를 일본과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청군은 5만명의 병력으로 프랑스군 16,000명에 패했고, 오랑캐로 얕잡아보던 일본에게도 무참히 패했다.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를 계기로 리훙장 세력이 실각하고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들이 권력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연이은 패전은 30여년간 지속해온 양무자강운동의 실패를 의미했다. 특히 대만의 주권이양은 홍콩이나 이리의 할양과는 성격이 달랐다. 1개 성을 통째로 일본에 내주고 말았다. 중국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1897년 러시아는 뤼순(旅順)의 조차권을 획득하고 만주를 경유하는 시베리아철도 부설권, 뤼순까지의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이런 상황 속에 두가지 사상적 기류가 나타났다. 첫째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배외(排外)운동이다. 둘째는 정부의 구조를 획기적으로 개혁하자는 변법(變法)운동이다. 배외운동과 변법운동은 청조의 무능을 일깨우고 외세를 극복하자는 점에서 뿌리는 같다. 하지만 두 운동은 방법론을 달리한다. 배외운동은 외국의 문물 일체를 거부하자는 것인데 비해, 변법운동은 서양의 제도를 본받아 중국을 자강시키자는 것이다.

 

변법론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캉유웨이(康有爲). 캉유웨이는 러시아의 표트르 황제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청나라를 변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광서제(光緒帝)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 개혁은 자기권력을 위협한다고 느낀 서태후의 쿠데타로 끝나고 만다. 1898611일부터 그해 922일까지 103일 동안 진행된 이 유신운동은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 한다. 100일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동양의 질서가 변화했을까.

 

캉유웨이 /위키피디아
캉유웨이 /위키피디아

 

캉유웨이(1858~1927)는 광둥성 해남현의 향신(鄕紳)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자학을 공부했으며, 명백한 근거에 입각해 논리를 전개하는 고증학을 무시하고 공자님 말씀 가운데 언외(言外)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유학에서 약간은 일탈했으나, 그의 젊은 시절 사상은 완전히 중국 전통적인 것이었다.

21살이던 1879년 그는 홍콩으로 여행했고, 1882년엔 향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뒤 귀향길에 상하이를 방문했다. 그는 홍콩과 상하이를 유람하면서 서양문물의 발전상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두 도시는 질서가 정연했고,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서양인들이 식민지에서 좋은 결과를 낳고 있다면 본국은 얼마나 진보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양을 공부하는데 집중했다. 강남제조총국과 선교사들이 출판한 책들을 모조리 구입해 읽었다. 그의 눈앞엔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 그는 중국의 낙후와 서양제국주의의 진보를 알게 되었다. 1883년엔 과거도 포기하고 그는 서학 공부에 열을 올렸다.

1888년 그는 관직도 없는 신분에서 광서제에게 일본의 현대화를 찬양하고 중국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은 국자감의 한 관리에 의해 거부되었다. 신분도 미천한데다 좀 이상한 이야기를 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캉유웨이는 광둥으로 가서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설립해 학술강의를 시작했다. 이 곳에서 그의 제자이자 변법자강운동의 핵심멤버가 되는 량치차오(梁啓超) 등 젊은 학자들이 그의 주장에 매료되었다. 캉유웨이는 공자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해 '옛것에 비추어 오늘의 제도를 고친다'는 개혁의 정신을 세웠다. 그는 저서 대동서’(大同書)에서 장삼세(張三世)라는 개념을 주장했는데, 세계는 거란세(拒亂世)에서 승평세(升平世)로 진보하고 결국엔 대동세(大同世)에 도달한다고 해석했다. 대동세는 일종의 공산사회로 받아들여지는데,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그는 유학에 물들어 있는 중국 사회에 개혁이 필연임을 강조한 것이다.

 

량치차오 /위키피디아
량치차오 /위키피디아

 

캉유웨이는 지식인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그 동안에도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지만 중간관리에 의해 거부되었다.

1895년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야 하는 때였다. 일본은 패전한 청나라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캉유웨이와 량치챠오는 1만자로 된 청원서를 작성하고 과거응시자들의 서명을 받았다. 서명에 응한 응시자는 600여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청원서에서 시모노세키 강화를 거부하고 수도를 옮겨 다시 싸우고 변법을 할 것을 조정에 요구했다. 이 상서도 중간 관리에 의해 황제에게 올라가지 못했다.

과거 시험관들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과거시험을 치른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떨어뜨리려 했다. 당시 과거 시험지에는 이름이 쓰여지지 않은 블라인드 테스트였는데, 시험관들은 이상한 논조를 펴는 답안지를 폐기해 버렸다. 량치차오의 시험지는 거부되었으나, 캉유웨이는 모범답안을 썼기 때문에 시험관을 속이고 붙었다.

뒤이어 열린 전시에서 캉유웨이는 진사 칭호는 받았지만 한림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6부 중에서 하챦은 공부(工部)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위키피디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위키피디아

 

캉유웨이는 자리보다는 황제에게 상서를 올리는 것에 주력했다. 공부 주사는 황제에게 상서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부서에 요청해 상소문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1895529일에 쓴 그의 세 번째 상서는 드디어 황제의 손에 도달했다. 그는 이 상서에서 부국(富國), 양민(養民), 지식인 육성, 연병(練兵)을 강조했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의 상서에 깊이 감명받아 이를 베껴서 태후, 군기처, 각 성의 고위관리에게 널리 배포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광서제는 캉유웨이를 알게 된다.

한달후 캉유웨이는 의회를 개설하는 내용의 상서를 올렸는데, 중간에서 거부되었다.

 

캉유웨이는 또한 자신의 주장에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학회를 조직하고 신문을 제작했다.

변법파들이 개설한 강학회에는 정부의 거물 각료와 영국과 미국 인사들이 참여했다. 떠오르는 군부의 인물 위안스카이(袁世凱)도 있었다. 이들은 서양 서적을 번역하고, 신문을 발행하고, 도서관, 박물관, 정치학회를 설립했다. 량치차오는 만국공보라는 신문 편집장을 맡았는데, 발행부수가 2,000부에 달했다.

캉유웨이는 몇몇 성을 여행하고, 강연했다. 그는 강연을 통해 개혁운동을 확산시켰으며, 후난, 장쑤, 광둥, 베이징 등지에서 수많은 학회와 학교, 신문 창간에 기여했다.

 

1897년 독일이 산둥반도 자오저우(膠州)를 조차하면서 중국엔 또다시 민족적 열풍이 불었다. 지방에 내려가 있던 캉유웨이는 급히 베이징으로 돌아와 상서를 올렸지만, 이번에도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내용은 대단히 솔직하고 대담했다. 그의 상서는 민간에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캉유웨이는 실망해 있는데, 그의 스승인 웡통허(翁同龢)가 그의 황제 알현을 중계했다. 웡통허는 광서제에게 캉유웨이가 자신보다 100배나 뛰어난 재능이 있는데, 만나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아라고 권했다. 황제는 캉유웨이를 만나겠다고 했다. 하지만 청 황실은 4품 이하의 하급관원이 황제를 접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며 만류했다. 이에 황제는 대신들에게 캉유웨이를 만나 보고 내용을 소상히 전하라고 지시했다. 1898124일 캉유웨이는 리훙장, 장군 영록, 병부상서 등을 만나 밤늦도록 시국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했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p326~363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p414~444

연인 서태후(Imperial Woman), 펄 벅, 2007, 길산

Wikipedia, Kang You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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