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사건②…서태후, 열강에 동시 선전포고
의화단 사건②…서태후, 열강에 동시 선전포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0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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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 세력을 믿고 서양 척결 의지…내부에서 반발, 지방 총독 불응

 

19005, 수도 베이징에 외국인 배척 운동이 공포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중국주재 외교 사절들은 텐진 외항에 머물고 있는 군함에서 병력을 데려오게 되었다. 공관과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외교당국인 총리아문은 외국 병사의 수도 주둔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공사관들의 집단적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어 그 수를 공사관별 30명으로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각국 공사관은 총리아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1~3일 베이징에 도착한 외국군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각각 75, 미국인 50, 이탈리아인 40, 일본인 25명이었다.

 

의화단 사건과 연합군 공격로 /위키피디아
의화단 사건과 연합군 공격로 /위키피디아

 

6월초 의화단이라 불리는 권민(拳民) 집단 수만명이 무더기로 베이징에 진입했다. 청 조정은 권민들을 제지하지 말라는 칙령을 각 성에 내려 보냈다. 의화단은 조정이 뒷배를 보아준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폭도화했다. 63일 권민들은 베이징~텐진간 경진(京津) 철도선을 절단했다. 그들은 열차가 해운업을 쇠퇴시켜 실업자를 양산하고 서양 제품을 실어나르는 괴물로 보았던 것이다.

산시성의 감군(甘軍) /위키피디아
산시성의 감군(甘軍) /위키피디아

청 조정은 주전론자로 채워졌다. 단친왕이 총리아문 수장이 되었고, 총리아문 대신도 강경파들이 차지했다. 조정은 무술집단의 폭력을 뒷받침했다. 철도에 이어 베이징~텐진 간 전보선도 절단되었다.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들은 고립되었고, 해상의 군함들과 연락이 끊겨졌다.

1899년 가을부터 1900년 여름까지 가뭄이 크게 들었는데, 농민들은 서양 귀신들 때문에 비도 오지 않는다는 미신을 믿게 되었다. 의화단과 결탁한 농민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들을 핍박했다.

의화단은 외국인과 외국인 시설을 타깃으로 했다. 영국 공사관의 여름 거처가 불태워졌고, 회교도 장군 동푸샹(董福祥)의 부대에 의해 일본공사관 서기 스기야마 아키라(杉山彬)가 살해되었다.

 

베이징에 무법천지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영국 공사는 텐진의 해군대장 시모어(Edward Seymour)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610일 시모어는 각국의 병사를 소집해 2,1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차를 타고 텐진을 떠났다. 하지만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에 의화단을 만나게 되어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전진이 저지되었다.

외국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권민들이 수도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교회와 외국인 거처를 불태우고 중국인 신도를 죽이거나 생매장했다. 또 마테오 리치, 아담 샬, 페르비스트 등 초기 선교사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공사관 호위병들을 습격했다. 620일에는 독일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Clemens von Ketteler)를 살해했다.

텐진도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의화단 무리들은 교회와 외국인 상점을 방화하고 중국인 기독교인들을 살해했다. 감옥을 공격해 죄수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습격했다.

 

전쟁이 불가피했다. 청 조정은 의화단 폭도를 지지했고, 외국 공사관은 자국시설과 자국인 보호를 위해 출병을 해야 했다. 단친왕과 동푸샹 등 조정의 강경파들은 외국 공사관을 전면 공격함으로써 반세기의 국치를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희태후(서태후)는 강경파의 주장에 동조했다.

온건파도 있었다. 616일 어전회의에서 위안창(袁昶)은 외국공사와 공식적으로 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며, 칼과 총에도 다치지 않는다는 도창불입(刀槍不入)이란 의화단의 주장은 미신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서태후는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지금 중국의 쇠약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인심마저 잃는다면 나라를 유지할수 있겠느냐며 의화단을 정식 군대로 편성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617일 청 조정은 어전회의에서 외국과의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마침내 서태후는 의회단의 지지를 얻어 열강과의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이부시랑 쉬징청(許景澄)은 서태후의 지시에 따라 외국 사절들은 24시간 내에 베이징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어 있던 광서제는 쉬징청의 예방을 받고 더 상의해서 처리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 서태후는 황제는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묵살했다고 한다.

 

텐진으로 회군하는 영국 시모어군 /위키피디아
텐진으로 회군하는 영국 시모어군 /위키피디아

 

청 조정의 이런 조치에 대해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8개국이 615일 출병을 결의했다. 8개국의 출병 소식에 열강이 서태후를 몰아내고 광세제를 복원시키려 한다는 미확인 정보가 돌았다.

서태후는 자칫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며 621일 외국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조정은 동시에 권민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조직해 외국 침략자들과 싸울 것을 각 성에 지시했다. 베이징 당국은 권민들에게 은과 쌀을 하사했다. 조정은 권민의 숫자가 3만명에 이르며 1,400개 소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서태후와 베이징의 강경파들은 오판했다. 폭도를 정규군으로 편성해서 서양세력과 맞붙어 싸우려 한 것은 그들의 수명을 단축시킬 뿐이었다.

청 조정은 의화단에게 서양인 인간사냥을 부추겼다. 단친왕은 외국인 남자 한 사람을 잡을 때 50냥을 상으로 주었고, 여자는 40, 아이는 30냥을 주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간사냥의 범죄행위를 사주한 것이다. 서태후는 배후에서 극도의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겼다.

 

의화단사건 때 베이징내 영국 공사관 구역을 지키는 영국인들. /위키피디아
의화단사건 때 베이징내 영국 공사관 구역을 지키는 영국인들. /위키피디아

 

베이징의 서양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공사관 역내에 호위병 450, 평민 475, 중국 기독교 신도 2,300, 하인 50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일치 단결해 폭도들의 침입을 저지했다. 외국인과 중국인 기독교들은 2개월에 걸친 중국 정부군과 의화단 공격을 방어해 냈다.

외국인들의 방어는 기적적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북양대신이자, 서태후의 측근인 롱루(榮祿) 장군이 공사관 관내를 공격하는 척했지만 방어선을 돌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롱루는 권민들을 믿지 않았지만 서태후에게 대들 용기도 없었다. 그는 다만 지시를 따르는 시늉을 내면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영사관 관내에 공포를 쏘고, 구경이 큰 신식 대포는 사용하지 않았다. 정규군이 뒤로 빠져 있는 상태에서 오합지졸인 의화단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서양인들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다.

 

베이징 조정의 선전포고에 반발한 또다른 세력이 있다. 지방에 주재하던 고위 관료들이다. 광둥의 리훙장(李鴻章), 난징의 류쿤이(劉坤一), 우한의 장즈둥(張之洞), 산둥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정의 선전포고를 인정하길 거부하고 잘못된 명령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은 중앙에서 권력을 행사하다가 서태후와 강경파들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열강과 무리하게 전쟁을 벌일 경우 파멸을 초래할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양광총독 류쿤이와 호광총독 장지둥은 외국 영사들과 상하이와 광둥지역애서 외국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외국인 지역에서 권민들의 준동을 진압할 것이라는 비밀 협정에 서명했다. 리훙장과 위안스카이, 푸젠, 저장성 총독도 이 협정에 동의했다. 베이징의 서태후와 그 주변의 강경파가 서양세력과 한판 결전을 벌이는 동안에 지방 총독들은 중앙과는 별도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중앙과 지방의 분리현상은 10년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조가 소멸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연인 서태후(Imperial Woman), 펄 벅, 2007, 길산

Wikipedia, Boxer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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