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사건③…황후를 우물에 던져버리고 도주
의화단 사건③…황후를 우물에 던져버리고 도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02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개국 연합군 반격, 서태후 시안으로 망명…리훙장 앞세워 평화협상

 

의화단 봉기에 대응해 열강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한 것은 19007월초였다. 최대 병력수는 55,000명이었다. 이중 일본군이 2만여명으로 40% 가까이를 차지했고, 이어 러시아군 13,000여명, 영국군 12,000여명, 프랑스와 미군 각각 3,000여명이 포함되었다. 연합군 총지휘관은 영국군 준장 알프레드 게이슬리(Alfred Gaselee)가 맡았다.

전투의 결과는 화력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연합군의 전진을 지연시킨 요소는 42°C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뿐이었다. 다구 포대가 함락되고, 714일 텐진이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연합군은 베이징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만주지역에선 러시아의 코사크 부대가 남하했다.

7월말 연합군은 텐진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연합군대는 도중에 저항하는 의화단과 청군을 바른 속도로 격파하고 814일 베이징에 진입했다. 그에 앞서 의화단과 청군을 지휘하던 리삥헝, 위루 등 만주족 지휘관들은 자결을 선택했다. 연합군의 베이징 진입으로 공사관 구역을 지닌 외국인 호위병, 시민, 중국인 기독교도들이 포위망에서 풀려났다.

 

광서제의 황후 진비(珍妃) /위키피디아
광서제의 황후 진비(珍妃) /위키피디아

 

자희태후(서태후)는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직전에 시안(西安)으로 도주했다. 광서제는 서태후를 따라가지 않으려 했다. 황제는 베이징에 남아 열강들과 강화조약을 맺고 정권을 되찾을 생각을 했다.

서태후는 의화단 사건의 와중에 권력이 광서제에게 넘어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태후는 황제에게 서둘러 도주할 것을 요구했다. 황후 진비(珍妃)가 광서제에게 베이징에 남을 것을 건의했다. 황후는 사태를 수습하고 태후로부터 자립할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65세의 태후는 허울뿐인 황후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불쾌했다. 서태후는 병사들에게 황후를 우물어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태후가 시키는대로 했다. 황후 진비는 그렇게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끌려가다시피 해 1023일 시안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의화단사건에 텐진을 공격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의화단사건에 텐진을 공격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의화단 사건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권민이라는 무술집단의 폭력행위만큼이나 연합군의 폭력도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얼마나 죽었는지, 부상당했는지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 다만 중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량학살, 러시아와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한 일부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배후에서 이런 난동을 부추긴 서태후는 평민복으로 갈아 입고 시안으로 도주했다. 수도 베이징은 연합군에 점령당했다. 서태후는 양광총독으로 쫓겨가 있던 리훙장(李鴻章)에게 사태수습을 명령했다.

리훙장은 청일전쟁(1894~1895) 당시에 직예총독겸 북양대신으로 패전을 맛본 후에 러시아에 경도되었다. 그는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류쿤이, 장즈둥, 위안스카이 등과 함께 외국인을 보호하고 권민 집단을 억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연유로 서태후와 시안 정부의 입장에서 열강 세력과 타협점을 모색할 인물로 리훙장을 꼽게 된 것이다. 리훙장은 다시 직예총독겸 북양대신에 임명되었다.

 

의화단 진압에 나선 연합군 /위키피디아
의화단 진압에 나선 연합군 /위키피디아

 

리훙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양측의 기가 꺾이지 않는한 협상은 이뤄지기 힘들었다. 자칫 협상 대표만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시안의 청조와 연합군의 틈새를 보아가며 몸을 움직였다. 협상을 간청한 쪽은 재앙을 일으킨 서태후와 조정이었다. 리훙장은 시안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연후에 중재에 나섰다. 연합군도 의화단 진압과정에는 일치단결했지만 반란세력이 소거된 이후엔 자국의 이해에 따라 분열 조짐을 드러냈다.

리훙장은 러시아군의 보호로 9월에 텐진에 입성했다. 연합군은 황제와 시안의 조정이 베이징으로 환궁할 것을 요구했다. 서태후를 제거하고 광서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종의 레짐체인지(regime change) 전략이었다.

서태후는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권력을 놓아야 할 상황을 두려워한 것이다.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걱정한 또다른 인물이 위안스카이다. 위안스카이는 2년전인 1898년 무술정변 당시 서태후와 그 일당을 척결하라는 광서제의 지시를 어기고 서태후 쪽에 붙은 전력이 있다. 광서제가 집권하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위안스카이는 걱정했다.

리훙장은 사태 파악에 빠른 인물이다. 그는 시안 조정의 환궁보다 의화단에 동조한 조정내 대신의 처벌로 마무리하자는 쪽으로 선회했다. 연합군도 각자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의화단 사건의 총책임자인 서태후는 이렇게 해서 또다시 살아날 기회를 찾게 된다.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 열강들이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욕심들 내는 모습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 열강들이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욕심들 내는 모습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리훙장과 열강과의 협상은 1년을 끌어 19019월에 신축조약(辛丑條約)이 체결되었다.

신축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화단사건 책임자 처벌

연합군은 고위관리 12명의 처벌을 요구했다. 의화단에 동조한 장친왕, 단친왕, 위시엔, 리삥헝, 쉬통, 동푸샹 장군이 이에 포함되었다. 장친왕에게는 사약에 내려졌고, 단친왕은 신쟝으로 유배되었다. 위시엔은 처형되었고 동푸샹은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미 죽은 캉이와 쉬퉁, 리삥헝도 관직을 삭탈당했고, 각 성에서 119명의 괸리들이 사형 또는 질첵까지 처벌을 받았다.

 

배상금

청조는 배상금조로 연합군 8개국에 6,750만 파운드, 45,000냥을 40년에 나눠 갚아야 했다. 가뜩이나 재정이 고갈된 상태에서 청조는 배상금을 갚느라 사실상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무장해제

보다 굴욕적인 조항은 외국군의 수도 주둔을 허용하고 중국군의 무장을 해제한 조항이다. 조약은 외국 공사관에 경비대가 창설되도록 했고, 다구와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포대를 철거하고, 2년내 무기수입을 금지토록 했다. 아울러 베이징에서 해로에 이르는 주요 지점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권민(의화단)이 기승을 부린 5개 도시에서 과거시험을 5년간 중지하도록 했다.

 

신축조약으로 청나라는 서구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정부는 제국주의적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할 능력을 상실했다. 의화단사건은 무지몽매한 민중의 반외세주의를 부추겨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는 구실을 제공했다. 그 중심에 부패한 만주족과 서태후가 있었다. 청조는 자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의화단 시건을 구실로 러시아는 1900720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만주의 전역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러시아의 의도는 만주를 제2의 부하라(Bukhara)로 만들어 제국의 영토로 삼을 요량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에 강력하게 맞섰다. 아프리카에서 보어전쟁(1899~1902)에 휘말려 있던 영국은 극동아시아의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 1902년 영일동맹이 그것이다. 의화단 사건에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연인 서태후(Imperial Woman), 펄 벅, 2007, 길산

Wikipedia, Boxer Rebellio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