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신부 앞세워 베트남 식민화 나선 프랑스
카톨릭 신부 앞세워 베트남 식민화 나선 프랑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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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사⑥…한때 응우옌 왕가의 조력자였던 프랑스, 침략자로 둔갑

 

푹 아인은 프랑스 신부의 도움으로 떠이 썬 일당을 물리치고 1802년 응우옌 왕조의 초대황제에 올랐다. 그는 어려울 때 도와준 프랑스 사람들을 궁정에 두었고, 카톨릭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보수적으로 돌아서 유교주의에 입각해 서양 문물을 배척했다. 푹 아인을 이은 2대 민 망(明命), 3대 티에우 찌(紹治), 4대 뜨 득(嗣德) 황제는 카톨릭을 무섭도록 탄압하고 서양을 적으로 돌리는 쇄국정책을 썼다. 조선말기 대원군과 비슷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

 

베트남엔 17세기부터 카톨릭이 전파됐다.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신부들이 베트남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응우옌 왕조는 카톨릭을 탄압했다. 종교탄압이 심해지면서 19세기 중엽엔 배트남 중부 안남(安南)과 북부 통킹(東京) 지역에서 30만명의 카톨릭 교도들이 배교해야 했다.

응우옌 왕조의 탄압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2대 민 망 황제 때인 1833년 프랑스 신부의 교사로 레반코이 반란이 일어나 카톨릭 황제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사이공(쟈 딘)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민 망 황제는 반란을 진압한 후 응우옌 왕조의 초석이었던 쟈 딘 성을 폭파시키고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을 처형하고 신자들을 탄압했다.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 이후에도 카톨릭 신자들의 산발적인 저항이 발생했다. 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 침공 명분을 만들어 줬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욕심 낸 것은 카톨릭 탄압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명분일뿐, 실제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식민지 팽창이 목적이었다. 프랑스는 중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베트남에 교두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베트남 및 주변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중요한 시장이었으며 원료 공급지로도 주목되었다. 영국이 버마 남부, 믈라카, 페낭,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고, 태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는 것도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1859년 2월 프랑스군의 사이공 공격 /위키피디아
1859년 2월 프랑스군의 사이공 공격 /위키피디아

 

1842년 영국이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승전하고, 중국에서의 우위를 차지하자,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베트남에 개입했다.

1847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베트남 중부 다낭에 수감되자, 프랑스 정부는 세실 제독이 이끄는 2대의 전함을 다낭에 파견해 그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함대는 선교사들이 풀려났는데도 다낭의 베트남 함대를 공격했다. 베트남 해군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프랑스 해군을 다낭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다낭에서 실패하자 프랑스는 남부 사이공으로 눈을 돌렸다.

1851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으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스페인 출신의 신부가 베트남에서 순교하자, 나폴레옹 3세는 스페인과 연합해 베트남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 해군은 1858에 다낭, 1859년에 사이공을 점령했다. 프랑스 식민지화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861년에는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이듬해인 1862년 뜨 득 황제는 항복했다.

 

1883년 프랑스군의 베트남 북부 남딘 공격 /위키피디아
1883년 프랑스군의 베트남 북부 남딘 공격 /위키피디아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불평등 내용을 담은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베트남 남부의 비엔호아, 쟈딘, 딘뜨엉 등 3개주가 프랑스로 할양되고,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의 동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프랑스는 사이공 점령에 이어 1871년엔 쟈 딘 전체를 획득했다. 그런 다음, 1883년에 북부 및 중부까지 획득했다. 중국 청나라가 개입해 전쟁(·불 전쟁)이 일어났지만, 프랑스가 승리했다.

1885년에 베트남은 주권을 상실했다. 다만 응우옌 황실은 그대로 유지시키되, 중부 지역인 안남(安南)만 통치하도록 했다. 황제의 실권은 없었고, 프랑스가 보낸 총독에 의해 사실상 통치되는 보호령이었다. 북부지역은 통킹(東京) 보호령으로 만들어 프랑스인과 베트남인이 공동으로 지배하는 형태였고, 남부는 '코친차이나(Cochinchina)'라는 이름으로 프랑스가 직접 지배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위키피디아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허울만 남은 응우옌 왕조 내부에도 이 기회를 이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유럽 전쟁으로 프랑스군 방위력이 약해지자 191652일에 판 보이 쩌우(潘佩珠)가 조직한 베트남 광복회가 쭈이 던 황제를 옹위해 반프랑스 전선을 펼칠 계획이었지만, 거사가 사전에 폭로되어 황제가 체포되었다. 주이떤 황제는 아버지 타이타인(成泰)과 함께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유배를 가고 대신 카이딘 황제가 즉위했다.

1925년에 카이딘 황제가 붕어하자 프랑스 유학 중이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保大)황제가 귀국하여 즉위했다.

중일전쟁(1937~1945)이 격화하면서 일본은 베트남으로부터 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해 베트남 북부에 진주했다. 2차 대전 기간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었고, 비시 정권 하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과 협력해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는 남부에도 진주했다.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했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3월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했다.

1945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1945311일에 베트남에서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프랑스군을 제압했고, 일본의 지원하에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의 영향력 하에 있고 독립을 허울 뿐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그 해 8월 힘의 공백을 틈타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민이 혁명에 성공했다. 이른바 베트남 8월혁명이다. 830일에는 바오다이 황제는 후에의 궁전에서 퇴위하고,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이르는 응우옌 왕조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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