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①…세살짜리 마지막 황제 푸이
신해혁명①…세살짜리 마지막 황제 푸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0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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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죽음 앞두고 선통제 지명…쑨원, 청조타도-공화정 수립 내걸어

 

의화단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희태후(서태후)는 겉으론 반성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주 눈물을 흘리며 내가 황제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구나고 후회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19008월에 중국의 불행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1901129일 서태후는 조정 대신, 각성의 순무와 총독, 외교사절들에게 개혁에 관한 건의를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서태후도 뭔가 개혁조치를 하지 않으면 청조가 붕괴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서태후 스스로가 추진한 신정(新政)은 청나라 마지막 10(1901~1911) 동안에 정치·경제·사회·교육·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구제도와 구습을 타파하려는 노력이었다. 서태후는 자신이 부정한 1898년 무술변법과 거의 비슷한 개혁을 받아들였다. 서양법률(西法)을 채택하고, 서양식 군사훈련을 도입하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공업과 기술을 장려하며, 낡은 관료기구를 폐지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서태후의 속마음은 의화단 사건에서 드러난 자신의 치욕을 덮는 것이었다. 태후의 진심에는 개혁을 원치 않았다. 서태후와 만주족 지배층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이해는 했지만, 어떻개 하면 개혁을 지연시킬까, 개혁과정에서 만주족의 집권을 강화할 것인가에 몰두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직후 베이징 자금성 앞에 도열한 외국군. /위키피디아
1900년 의화단 사건 직후 베이징 자금성 앞에 도열한 외국군. /위키피디아

 

1905년엔 입헌군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앞서 러일전쟁(1904~1905)에서 서양의 전제군주국 러시아가 동양의 입헌군주국 일본에 패한 사실이 중국 지식인들을 자극했다. 러시아에서도 두마(의회)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랑치차오(梁啓超) 등 무술변법파들이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창하고 나섰다.

만주족 지배자들의 입장에선 군주제를 폐기하고 공화제를 채택하자는 쑨원(孫文)과 같은 혁명파들의 주장보다는 입헌군주제가 권력 유지에 유리했다. 만주족 귀족들은 짜이쩌(載澤) 5인의 사절단을 구성해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고 돌아와 일본의 헌법제도와 유사한 입헌군주국제도를 건의했다. 서태후는 19069월에 사절단의 보고서에 서명했지만, 시행일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엔 시행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1908827일 청조는 헌법대강(憲法大綱)을 공포하고, 9년간의 예비기간을 규정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헌법대강의 준비기간 9년을 버티지 못했다. 더욱이 73세의 서태후는 곧바로 중병에 걸렸다.

서태후는 19081115일 세상을 떠났는데, 공교롭게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날인 1114일에 37세의 광서제(光緖帝)가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루머가 돌았다. 그 중 하나는 서태후가 죽을 병에 걸리자 광서제가 매우 기뻐했는데, 서태후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이 광서제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루머는 서태후가 죽어 광서제가 친정에 나서면 위안스카이가 위태로워질 것이므로,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1898년 무술정변 때 광서제를 배신한 적이 있다.

자금성의 구중궁궐에서 일어난 일이라, 루머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서태후가 죽기 이틀전에 롱루(榮祿) 장군의 딸과 광서제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푸의(溥儀)를 차기 황제로 지목했으니, 그가 청 황실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청 황실은 서태후가 죽은지 3년후인 19111010일 신해혁명으로 인해 마감한다. 서태후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1908년 세 살에 제위에 오른 푸이(초상화) /위키피디아
1908년 세 살에 제위에 오른 푸이(초상화) /위키피디아

 

청나라를 멸망시킨 세력은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제를 실현하자는 혁명파였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쑨원(孫文, 1866~1925)이다.

쑨원은 18661112일 광저우 부근 샹산(香山)현에 있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쑨원은 태평쳔국의 난이 진압된지 2년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2의 홍슈취안’(洪秀全)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고 한다.

샹산현은 토지가 척박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외지에 나가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의 큰형 순메이(孫眉)는 어려서 하와이로 건너가 사업을 일으켰다. 쑨원은 13살에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의 형에게로 건너갔다. 당시 하와이는 독립왕국이었고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선이 신기함, 번화하고 풍족한 생활, 공평한 세금징수 등을 목격했다. 이어 17세에 홍콩으로 돌아와 영어와 의학을 공부했고, 1892년엔 마카오에서 의료업을 개업했다.

28살이던 1894년 쑨원은 동료와 함께 베이징으로 가 리훙장(李鴻章)을 면회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했다. 당시 리훙장은 청일전쟁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쑨원의 건의를 들여다 볼 틈이 없었다. 쑨원은 리훙장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판단하고 만주족 타도의 결심을 강화했다.

 

쑨원(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그의 가족들 /위키피디아
쑨원(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그의 가족들 /위키피디아

 

189411월 쑨원은 호놀룰루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는데, 최초 회원은 112명이었다. 이어 18952월에 홍콩에도 흥중회를 조직하고, 중국 각지에 지부를 설립했다. 그들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그렸는데, 이 기가 지금도 중화민국(대만)의 국기다.

쑨원은 흥중회를 통해 청조를 타도하는 혁명운동을 모의했다. 기일은 18951026일로 잡았으나 준비가 덜 된데다 계획이 누설되어 광저우봉기(廣州起義)는 실패로 끝났다. 쑨원은 홍콩으로 도주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에 쑨원의 입경을 금지해달라고 요구했고, 영국 당국도 이를 받아들였다.

쑨원은 이에 일본으로 도피했다. 쑨원은 일본에서 흥중회를 조직하고 일본 재야 정치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189610, 쑨원은 런던으로 건너갔는데, 런던주재 청국 외교관들이 교회에 가던 쑨원을 납치해 공사관에 연금시켰다. 쑨원은 청국 공사관 청소부를 통해 자신의 납치 사실을 영국인 은사 캔타일 박사에게 전했다. 캔타일 박사는 그의 납치 사실을 영국 언론에 폭로했다. 이에 영국 외교부가 화들짝 놀라 청국에 압력을 넣어 쑨원을 풀어주도록 했다. 덕분에 쑨원은 일약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쑨원은 영국에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쑨원은 일본에서 그의 혁명 이른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완성한다. 삼민주의은 민족(民族), 민주(民主), 민생(民生)을 말하는데, 민족주의는 만주족을 타도하자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전제주의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것이며, 민생주의는 토지균분을 통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말한다. 쑨원의 삼민주의는 맹아적 단계를 거쳐 점차 혁명이념으로 승화했다.

 

쑨원 /위키피디아
쑨원 /위키피디아

 

쑨원의 혁명주의는 1898년 무술정변의 주도자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가 일본으로 망명해 보황당(保皇黨)을 조직하면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캉유웨이와 랑치차오는 혁명과 공화제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특히 캉유웨이는 광서제의 스승을 자처하며 쑨원과 같은 혁명파를 반역도당으로 몰았다. 군주제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따라 캉유웨이의 보황파와 쑨원의 혁명파는 물과 불처럼 대립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발생하자 쑨원은 또다시 봉기를 준비했다. 그는 쩡스량(鄭士良)을 광둥성 후이저우(惠州)로 보내 봉기를 시도했는데, 이번에도 계획이 사전에 누설된데다 도와주기로 했던 일본이 발을 빼는 바람에 실패했다. 두 번째 봉기가 실패했지만 쑨원의 중국내 이미지는 상승했다. 의화단이라는 그릇된 운동에 염증을 느끼던 중국인들이 쑨원의 집단을 애국적인 혁명운동으로 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봉기가 실패한 이후 쑨원은 조직의 외연적 확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3~1905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혁명단체들은 1905820일 연합해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라는 하나의 통일 조직으로 합쳐졌다. 회장은 37세인 쑨원이 선출되었다. 동맹회 창립식에는 70명이 가입했다. 이 단체는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결정하고 오랑캐(만주족)을 몰아내 중화를 회복하고 민권을 보호하기 위한 민국(民國)을 수립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쑨원의 삼민주의는 동맹회의 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중국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19114월에 광동성 수도 광저우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해 1010일에는 우창에서 봉기가 터졌다. 쑨원과 동맹회는 전국적인 봉기를 주도하며 혁명운동으로 전환시켰다.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하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Wikipidia, Late Qing reforms

Wikipidia, Sun Yat-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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