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③…어린 황제는 퇴위 사실도 몰랐다
신해혁명③…어린 황제는 퇴위 사실도 몰랐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0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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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세력과 위안스카이 야합으로 청 황실 소멸…수천년 군주제 종식

 

청조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의 본명은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簿儀)이며, 전임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자이펑(載豊)의 아들이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자희태후(서태후)가 죽음에 임박해 광서제의 후임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190812, 푸이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내관들이 푸이를 황실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푸이가 황제로 낙점된 직후 서태후와 광서제는 하루 사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고, 푸이는 아버지 품에서 즉위했다. 즉위식에서 푸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아버지 순친왕은 울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달랬다. 대신들은 황제의 울음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다. 푸이는 어머니 곁을 떠나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푸이가 등극했을 때 서태후가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만주족 황실의 권력은 순친왕에게로 넘어갔다. 순친왕은 이복형 광서제를 배신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순친왕은 위안스카이가 다리에 병이 나서 휴식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19091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복형 광서제에 대한 복수를 단행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실각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군부 요소요소에 주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복귀를 기다렸다. 리훙장(李鴻章), 장즈둥(張之洞) 등 한족출신 고위관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만주족 황실이 한족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할 것이라 믿었다.

 

위안스카이(1912년)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1912년) /위키피디아

 

191110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난징에 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되자 순친왕은 절망에 빠졌다. 순친왕은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 호광총독에 임명했다. 위안스카이는 교활했다. 그는 파면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고, 지방총독 자리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작았다. 위안스카이는 다리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정에 복귀하는 것을 사양했다.

위안스카이는 무너져 가는 청군과 신흥 혁명군 사이에 시소 게임을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무너져 갔다. 11월말 해군군관 싸전빙(薩鎭氷) 등이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만주 황실은 다급하게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6가지 조건을 조정에 요구했다. 1년내 국회를 소집할 것, 책임내각을 조직할 것, 혁명당원을 대사면할 것, 정당활동을 허용할 것, 육해군 지휘권을 자신에게 줄 것, 군비 충족을 보증할 것 등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조건은 혁명파와 타협하고, 군권을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순친왕은 위안스카이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19111027일 위안스카이는 흠차대신으로 임명되고, 해군과 육군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위안스카이 지휘 하의 북양군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 지휘 하의 북양군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는 1859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고관 대작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거에 두 번이나 떨어졌으나, 리훙장의 안후이군(安徽軍)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쌓았다.

23살이던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서울에 파견되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했고, 1884년 갑신정변 때에 김옥균 등으로부터 고종을 구출했다. 1885년 리훙장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상주하며 조선의 내정·외교를 간섭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로 도주했다.

청일전쟁 이후 그는 톈진(天津) 부근에서 7.000명의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켰다. 그는 돤치루이(端祺瑞)ㆍ펑궈장(馮國璋) 등 부하를 양성해 북양(北洋) 군벌의 기초를 마련했다. 북양군벌은 모두 현대식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신군(新軍)으로 불린 이들은 독일 모델을 따랐으며, 그들은 대부분 위안스카이에게 개인적 충성을 다했다.

1901년 리훙장이 세상을 떠난후 위안스카이는 군부에서 가장 중요한 쯔리(直隷) 총독과 북양(北洋) 대신이 되어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는 1898년 무술정변 때에 광서제를 배신하고 서태후의 편에 섰고, 의화단 사건 때엔 의화단에 등을 돌렸다. 위안스카이는 1908년 선통제가 즉위하자 섭정이 된 순친왕의 미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했다가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조정의 실권을 잡게 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군권을 장악한 후 직계부하인 펑궈장과 돤치루이를 제1군과 제2군의 지휘관에 임명했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에게 명해 혁명군을 공격하고, 112일 한커우를 탈환했다. 위안스카이는 만주족에게 자신이 없으면 청나라가 무너질 것임을 각인시킴과 동시에 혁명군에게도 북양군의 우세함을 과시했다.

 

쑨원과 동맹회 지도부 /위키피디아
쑨원과 동맹회 지도부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가 군권을 잡은 후에도 청군의 동요는 끊이지 않았다. 화북지방에 주둔하던 제20진의 군사령군 2명이 입헌군주제 실행을 요구했다. 이에 섭정을 맡았던 순친왕이 사퇴하고, 경친왕(慶親王)도 총리직을 내놓았다. 111일 위안스카이는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이 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내각을 조직하고, 수도 지역 군대를 장악했다. 5살 된 황제 주변에는 광서제의 왕후였던 융유태후(隆裕太后)만 허약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권력의 향배에 민감하게 움직였다. 그는 만주족 황실이 더 이상 유지될수 없고, 혁명군도 청조를 무너뜨릴 군사력과 결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북양군을 매개로 청 황실과 혁명군을 중재해 대륙의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11월초 위안스카이는 사람을 보내 난징 혁명정부의 임시부통령 리위안홍과 접촉하고, 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을 혁명군 총사령관 황싱을 만나게 해 양측의 연합행동을 제의했다. 혁명군측은 위안스카이의 술수를 우려해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남하시켜 후베이성 한양(漢陽)을 함락, 혁명세력을 압박했다.

영국 대사의 중재로 양측은 상하이에서 평화회담을 열었다. 혁명군의 황싱은 위안스카이가 청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제를 지지한다면 공화국의 총통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위안스카이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황싱이 혁명정부의 총통을 결정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1229일 쑨원이 난징정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원하던 자리를 쒄원이 차지하자, 화가 나 회담을 중단시켰다.

 

퇴위후 자금성에 살고 있는 선통제 푸이 /위키피디아
퇴위후 자금성에 살고 있는 선통제 푸이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는 교활했다. 그는 혁명세력이 쑨원의 지도력에 의해 결집되어 있지 않고, 군사력에서 청군과 북양군을 제압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혁명세력 내에서도 위안스카이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혁명파들도 위안스카이만이 만주족 황제를 퇴위시키고 내전을 종식시킬 인물로 보았다. 쑨원도 이런 생각에 동의했다. 그도 청 황실만 전복된다면 자신이든, 위안스카이든 누가 총통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19121월 위안스카이도 화를 풀고 자신이 총통이 된다면 청 황제의 퇴위를 촉구하겠다고 난징 정부에 통보했다. 쑨원도 위안스카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위안스카이는 경친왕을 통해 청 황실에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조건은 퇴위 후에도 황제에게 후하게 보상한다는 것이었다.

117~193차례 어전회의에서 황제 퇴위에 관해 논의가 이뤄졌다. 다수의 만주족과 몽골족 친왕들이 푸이의 퇴위를 반대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의 부하 돤치루이는 황족들이 공화제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군대를 거느리고 베이징으로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어린 황제 푸이와 위안스카이, 용유태후가 궁궐에서 만나 최후의 대화를 나눴다. 푸이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태후는 양성전(養性殿) 옆의 방에 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고, 뚱뚱한 노인(위안스카이)이 그 앞의 빨간 쿠션 위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떨어 뜨렸다. 나는 태후의 무릎에 앉아서 이 두 어른이 왜 울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셋밖에 없었고, 대단히 조용했다. 뚱뚱한 남자는 무슨 말인가 했으나, 나는 그가 무슨말을 했는지 알수 없었다.”

1912212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퇴위한다. 푸이는 자금성에 남아 황제로서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퇴위한 사실도 몰랐다. 황제는 칭호를 그대로 유지했고, 개인 재산을 소유했으며, 매년 400냥의 보조를 받았다. 과거의 시종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한 조치는 명목상일뿐, 실질적인 중국의 황제는 이날로 명맥이 끊어졌다. 청 왕조는 268년만에 막을 내렸으며, 진시황 이래 2000년간 내려오던 중국 천자(天子) 제도도 이로서 종언을 고했다.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하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마지막 황제, 에드워드 베어, 한마음사, 1988

Wikipedia, Puyi

Wikipedia, Yuan Shi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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