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사육신묘에 충신 일곱 명을 모신 까닭
노량진 사육신묘에 충신 일곱 명을 모신 까닭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8.10 0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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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조성, 해방 이후 확장…원래는 6인 묘역이었으나, 김문기 추가

 

노량진 사육신공원 입구 벽에 함석헌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러지만 세조의 피바람뒤에 우리는 의()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육신의 절개를 라고 했다. 절의와 대의명분을 숭상하던 사대부들이 세조의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권력 찬탈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성리학에 절어 있던 조선 유학자들은 자신의 주군을 지키는 의리를 정의라고 규정했고, 그런 가치관이 이곳 사육신공원에 배어 있다.

 

사육신공원 홍살문 /박차영
사육신공원 홍살문 /박차영

 

때는 세조 2((1456) 61, 세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했는데, 그때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무인 성승(成勝)과 유응부 등이 별운검(別雲劍)을 맡게 되었다. 별운검이란 칼을 차고 왕 옆에 시립하는 무관을 말한다.

그런데 일이 뒤틀려 버렸다.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무장 유응부는 기밀 누설을 염려해 거사를 예정대로 강행하자고 했으나,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다음 기회를 노리자며 주장하는 바람에 거사가 보류되었다.

일이 차질을 빚자 거사에 동참했던 김질(金礩)이 겁을 먹고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사건을 밀고했다. 이로써 단종 복위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은 줄줄이 엮여 죽음을 맞이했다. 희생자는 70여 명에 이르렀다. 복위운동에 가담한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연좌의 처벌을 받았다. 집안의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까지 관비가 되었고, 가산도 몰수되었다. 그들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불이문 /박차영
불이문 /박차영

 

조선의 문신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문집 추강집’(秋江集)육신전(六臣傳)을 싣고,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 희생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여섯 신하를 기록했다. 이후 이들 여섯 신하를 사육신이라 불리었다.

사육신 가운데 박팽년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효수되었다. 그런데도 세월이 흐르고 언제부터인가 민간에서 한강가 노량진 언덕에 있는 몇 기의 무덤을 사육신묘라 하여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기리게 되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朴氏之墓, 兪氏之墓, 李氏之墓, 成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네 개의 무덤과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어왔고, 민간에서는 네 개의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의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 전해왔다.

 

의절사 /박차영
의절사 /박차영

 

민간에서만 전승되던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숙종 때부터다. 숙종은 노량진에 군대를 사열하러 갔다가 육신묘의 봉분을 가꾸도록 하고, 숙종 7(1681)에는 사육신 사당으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다. 정조 6(1782)에는 사육신의 묘비인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해방후 19555월에 묘역 내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 서울시는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3,240평이던 묘역을 8,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義節祠)와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 등을 건립했다.

 

의절사 내에 7명 충신의 위패 /박차영
의절사 내에 7명 충신의 위패 /박차영

 

본래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다가 1977년부터 하위지와 유성원의 허묘(虛墓)를 마련함으로써 여섯 무덤이 비로소 온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행적으로 볼 때 김문기(金文起)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논란 끝에 김문기도 허묘를 쓰고 위패를 봉안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지금은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를 포함해 7인의 무덤이 있다.

 

신도비각 /박차영
신도비각 /박차영

 

사육신 공원은 한강 강변에 위치해 야트마한 야산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 한강과 여의도, 강북 지역을 시원하게 조망할수 있다.

 
사육신묘 전망대에서 본 한강 /박차영
사육신묘 전망대에서 본 한강 /박차영
육각비 /박차영
육각비 /박차영
본래의 묘역 4기(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 /박차영
본래의 묘역 4기(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 /박차영
허묘 3가(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박차영
허묘 3가(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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