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제국①…앙크로 와트 문명의 주역
크메르 제국①…앙크로 와트 문명의 주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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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C 인도차이나 석권했으나, 어느날 갑자기 멸망

 

캄보디아는 고대 이래 중국문화권보다는 인도문화권과 더 많은 문화적 접촉을 가졌다.

캄보디아가 중국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세기경 부남(扶南, Funan)이다. 부남은 지금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남부 메콩강 하류, 태국, 말레이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부남은 여러 지방세력이 연합한 연방국가로 산스크리트를 사용하고 바라문 승려와 불경이 혼재한 인도문화 영향권에 있었다.

 

푸난(부남)의 영역 /위키피디아
푸난(부남)의 영역 /위키피디아

 

부남은 550년께 북쪽에서 내려온 진랍(眞臘, Chenla)에 흡수되었고, 진랍은 770년에 메콩강 하류지역의 수()진랍과 내륙의 육()진랍으로 분리되었다.

그후 수진랍의 왕이 인도네시아 해상왕국인 샤일렌드라 왕조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탈출해 802년에 새 왕조를 열었는데, 그가 크메르 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다. 크메르 왕조는 12세기 무렵에 지금의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 일부를 포함한 대제국(Khmer Empire)으로 성장했다.

 

진랍의 영토 /위키피디아
진랍의 영토 /위키피디아

 

크메르 왕조는 자야바르만 2(Jayavarman II)가 건국한 802년부터 태국에 의해 멸망하는 1431년까지 600년간 지속했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통일신라 장보고 시절부터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까지다.

전성기 시절에 수도 앙코르 톰에는 100만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런던 인구가 7만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으니, 크메르 제국의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13세기에 세계최대의 제국을 형성한 몽골()은 중국을 지배하고, 베트남, 미얀마와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지만, 크메르 제국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원나라는 주달관(周達觀)과 같은 관리를 보내 크메르 제국을 속국했다는 형식에 만족했을뿐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몽골의 사절 주달관도 그의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이를 인정했다.

원나라는 베트남 남부 점성((占城, 참파)에는 사도원수를 파견하고 행정기관을 설치했지만, 캄보디아에는 호부만호와 금패천호를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장수들이 부임 도중에 잡혀서 그후 소식이 단절되었다. 이후 원나라는 1295년에 사신을 보내 크메르를 굴복시켰다고 주달관은 주장한다.

주달관은 중국 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어서 자신이 마치 칙사나 된 듯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기행문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크메르 왕국을 굴복시켰다고는 했지만, 앞서의 사신들처럼 죽어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동유럽까지 침공했던 몽골이 무력을 쓰지 않고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한 사실은 크메르 제국의 힘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크메르 제국의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크메르 제국의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크메르 왕국은 씨엠립(Siem Reap)에 있는 앙코르 와트(Angkor Wat)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유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9~14세기 크메르 왕국은 지금의 캄보디아는 물론 태국, 라오스, 베트남 남부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을 형성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거대한 제국의 왕궁과 무덤이 어느날 갑자기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19세기에 들어와 서양인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왕국은 어떻게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어떻게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잊혀졌을까.

1860년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는 원주민들 사이에 전설 속의 신이 지었다는 앙코르 왕도(王都)를 찾아 나섰다. 그는 고대 크메르왕국 수도가 있었던 씨엠립 지역에서 3주일을 보내면서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 프놈 바켕 등을 둘러보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솔로몬왕의 신전에 버금가고, 미켈란젤로와 같이 뛰어난 조각가가 세운 앙코르 와트, 이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세운 것보다도 더 장엄하다.”.

그는 밀림 속에 잠들어 있던 앙코르 제국을 유럽에 소개했고, 그 뒤를 이어 유럽인들이 이 고대 제국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 그 베일을 하나씩 벗겨냈다.

 

앙코르 와트의 규모는 엄청나다. 외벽은 동서 1.5km, 남북 1.2km의 직사각형이고, 바깥은 해자로 둘러 싸여 있다. 외부에서 190m나 되는 해자를 건너려면 육교를 건너야 한다. 해자를 건너면 3기의 탑이 있고, 참배로를 따라가면 중앙사원이 나온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도시)와 와트(사원)의 합성어로, ‘도시의 사원또는 사원의 도시라는 의미다. 동쪽 회랑 남반부 벽에는 악마와 신들이 머리 다섯인 뱀(바수키)을 잡고 줄자리기를 하는 49m 길이의 거대한 부조물이 있다.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신화 가운데 우유바다 휘젖기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앙코르 와트는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다. 1296~97년 몽골() 제국의 사신으로 크메르 왕국을 방문한 주달관은 기행문 진랍풍토기에 앙코르 와트에 대해 노반의 묘’(鲁班墓)라고 표현했다.

노반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건축의 대가를 말하는데, 주달관은 그의 이름을 빗대 아주 유명한 건축기가 지은 무덤이른 뜻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주달관의 해석에 따르면 앙코르 와트는 무덤이다.

캄보디아 전설에는 앙코르 와트가 원래 왕궁이었다가 왕의 사후에 무덤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이 거대한 무덤에 묻힌 왕은 누구인가. 캄보디아를 식민화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와트의 회랑 부조를 관찰한 결과, 수리야바르만 2(재위 1113~1150)라고 추정했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8대 현종에서 11대 문종까지의 시기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베트남 북부 대월국(大越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베트남 남부 참파왕국을 공격해 코끼리에 올라탄 참파 왕의 목을 베었다. 그가 앙코르 와트를 건설한 것은 정복욕만큼이나 사후에 천국에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앙코르 와트 /위키피디아
앙코르 와트 /위키피디아

 

앙코르 와트만큼이나 웅장한 건축물은 앙코르 톰(Angkor Thom)이다. 앙코르(도시)와 톰(위대하다)라는 단어가 합쳐져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의 성곽도시다.

앙코르톰의 주안공은 분명하게 기록되고 있다. 1177년 베트남 남부 참파왕국의 공격으로 크메르 왕이 죽고 수도가 파괴되었는데 한 왕자가 이 '침략군'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니 자야바르만 7(1181-1218). 그 왕이 앙코르 톰을 건설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시기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다. 왕위에 오른 자이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국가 쇄신책을 추진한다. 그는 싯다르타 붓다가 부패한 힌두교 사제를 끌어내리듯 불교를 동원해 힌두교 중심의 구질서를 개혁하려 했다.

 

그가 받아들인 불교는 대승불교였다. 그는 자비로운 군주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스스로를 부다나자(부처왕)라고 불렀다. 대승불교는 깨달음 위주의 소승불교와 달리 통치 이념이 강한 불교로서, 중생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앙이다. 대표적인 불상이 관음보살상이다. 앙코르 톰 성벽의 출입문, 바이욘 사원, 타 프롬 사원에 세워진 관음보살상은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이념을 보여준다.

그는 제국의 도로를 정비했다. 앙코르에서 태국 피마이 지역까지 225km의 도로를 뚫었다. 이런 도로를 기반으로 이 임금은 서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부, 북쪽으로 라오스 일대, 동쪽으로 참파왕국까지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때 태국지 역에 건설한 도로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앙코르 톰은 1431년 태국이 세력을 확장해 도성을 함락할 때까지 2세기 동안 앙코르 제국의 왕도로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몽골도 건드리지 못한 이 제국이 왜 어느날 갑자기 멸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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