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에 깃든 정주영의 혼…사력댐으로 결정
소양강댐에 깃든 정주영의 혼…사력댐으로 결정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8.18 13: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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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댐 계획을 사력댐으로 변경…공사비 절감, 강도 보강

 

춘천 청평사 계곡에서 내려오면 소양호다. 호수가에 선착장에는 30분마다 배가 들어오고 나간다. 배에 올라타 20여분 갔을까, 우리는 소양강댐에 도착했다.

소양강댐은 다목적댐으로 댐 높이 123m, 제방길이 530m, 수면면적 70, 총저수량 29억톤이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74월 착공, 197310월 준공되었다.

 

수문개방한 소양강댐 /사진=춘천시
수문개방한 소양강댐 /사진=춘천시

 

경제건설 초기였던 그 시절에 소양강댐 건설은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과 함께 3대 국책사업의 하나였다. 이 댐은 사력댐으로 건설되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사력(砂礫) 댐은 댐 본체를 암석과 자갈을 주재료로 쌓고, 윗면에 콘크리트 또는 철근콘크리트로 막는 방식을 말한다. 소양강댐은 당대에 국내 최대는 물론 동양 최대의 사력댐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력댐 방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댐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던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소양강댐 /박차영
소양강댐 /박차영
소양강댐 /박차영
소양강댐 /박차영

 

소양강댐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 일부 투입된 공사로, 일본공영이라는 회사가 설계에서 기술, 용역까지 맡았다. 댐에 관해 세계적 기업이었던 일본공영은 소양강댐을 콘크리트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건설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결정된 방식을 정주영이 뒤집었다. 당시 국내엔 제철소가 없어 콘크리트방식으로 하려면 엄청난 양의 철근을 수입해야 했다. 시멘트도 부족했고, 설사 이런 것들이 준비된다 해도 경춘선 철도와 도로가 건자재를 수송할 능력이 부족했다.

정주영은 우리나라 지천에 갈려 있는 암석과 자갈로 사력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담당자들에게 세계의 댐 자료를 다 모았다. 자료를 모아보니 2차 대전 이후 100m 이상 댐은 사력댐으로 만드는 게 세계적인 추세였다.

정주영은 건설부에 소양강댐을 사력댐으로 만들자고 제시했다. 그 무렵에 건설업자가 정부 발주공사에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정부 사람들은 펄펄 뛰었고, 일본공영도 모욕적으로 나왔다. “당신은 어디서 댐 공부를 했는가. 무식한 소리 하지 마라. 그게 어디서 배운 소리냐. 당신 선생이 누구냐등등 정주용은 당시 먹을수 있는 욕은 다 먹었다고 자서전에 썼다.

 

소양강댐 선착장 /박차영
소양강댐 선착장 /박차영

 

최종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의 주장을 듣고 재검토를 지시했다. 재검증 결과, 건설비를 30% 줄일수 있고, 소양강댐 인근 암반이 약해 콘크리트댐보다 사력댐이 낫다는 결론이 났다.

이렇게 해서 소양강댐은 사력댐으로 지어졌고, 1차 공사는 1967224일 현대건설로 결정되었다. 댐에 들어간 자갈과 흙의 양은 엄청나다. 당시 국민 한 사람당 일곱 가마 꼴이다. 소양강댐의 완공으로 서울과 수도권 인구가 1년 동안 쓸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됐고, 아울러 전력도 생산할 수 있었다.

 

소양강댐 준공기념탑 /박차영
소양강댐 준공기념탑 /박차영

 

우리는 소양호가 보이는 한 카페에서 오랫동안 경치를 즐기다가 춘천 시내로 돌아갔다.

 
소양감댐 하류 /박차영
소양감댐 하류 /박차영
소양강처녀상 /박차영
소양강처녀상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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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율 2023-10-02 05:09:08
이번 태풍 리비아 댐 붕괴 3만명 사망 댐도 사력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