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의 復辟…선통제, 폐위 5년만에 반짝 복위
12일의 復辟…선통제, 폐위 5년만에 반짝 복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2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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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쉰의 쿠데타로 淸 황실 일시 복권…북양파의 군사행동으로 종식

 

위안스카이는 거물이었다. 그는 곧 북양군벌의 핵심이요 베이징 정권의 기둥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를 타도하려던 세력들의 뜻대로 죽음으로써 권력을 내려놓았다. 그가 죽자 권력은 구심력을 잃고 여럿으로 나눠졌다.

1916616일 위안스카이가 급사한 이후 부총통이던 리위안훙(黎元洪)이 대총통 자리를 계승했다. 리위안훙이 대총통이 되는 것에 대해 북양군벌이나 남쪽의 혁명세력 사이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대총통이 유고되면 부총통이 승계하는 것이 마땅했고, 혁명세력도 리위안훙이 난징정부에서 부총통을 한 인물이었기에 적어도 우리 편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다.

 

리위안훙은 얼떨결에 중국의 최고지도자에 오른 인물이다. 해군사관학교 격인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을 졸업하고 청일전쟁에 참전했으나 전투함이 일본군에 격침되어 바다에 포류하던 중에 구출되었다. 신해혁명 때엔 후베이성 우창에 주둔하다가 그가 지휘하던 신군이 혁명에 가담하자 달아나 친구의 집에 숨어 버렸다. 지휘관이 없던 혁명군이 그를 억지로 끌어내 혁명군 수장에 앉혔다.

뜻밖에 혁명군 수장이 된 그는 난징정부에서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선출될 때 부총총이 되었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을 이어받을 때 난징정부 몫으로 다시 부총통을 맡았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를 왕으로 봉했으나 그는 고사했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권력에 공백이 생겼고, 리위안훙은 대총통 자리를 꿰어 차게 된 것이다. 리위안훙은 힘이 없었다. 권력은 북양군벌이 쥐고 있었다. 실권이 없으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카리스마를 세울수 없고, 리더십을 보여주기 어렵다. 그런 위치에 있었지만 리위안훙은 중화민국의 제2대와 제3대 대총통을 지낸 입지전적 정치인이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북양군벌은 왕스전(王世貞). 펑궈장(馮國璋), 돤치루이(段祺瑞) 등 이른바 북양 3걸의 손에 넘어갔다. 세 사람은 위안스카이에겐 모두 충복이었지만, 서로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죽은후 펑궈장이 부총통, 돤치루이가 국무총리가 되었고 왕스전이 육군총장(장관)을 맡았다. 비북양계의 리위안훙과 북양계의 연합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호국전쟁을 일으켰던 혁명파들은 전쟁을 중단했고, 81일에는 위안스카이에 의해 해산된지 2년만에 국회가 다시 열렸다. 일단 모든 것이 평온해 진 것처럼 보였다.

 

평온을 깬 것은 대총통과 국무총리와의 견해차였다. 돤치루이는 1차 대전에 참전해 독일을 공격하자고 했고, 국회의원 다수와 리위안훙은 중립을 지키자고 했다. 중국과 독일 사이에 가장 큰 분쟁거리인 산둥반도 칭다오는 이미 1차 대전 개전과 동시에 1914년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텐진과 한커우의 독일 조차지 정도의 문제만 남아 있었다. 이 좁은 조차지를 되돌려 받기 위해 중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독일은 이미 패색이 짙어 굳이 참전하지 않아도 조차지가 중국에 돌아올 공산이 컸다.

돤치루이가 노리는 것은 다른데에 있었다. 독일에 개전하면 미국과 일본에게서 차관을 얻을수 있게 된다. 그는 이 자금으로 자파 군사조직인 안후이(安徽)파를 육성할 요량이었다.

1917514일 돤치루이는 국회의 동의와 대총통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리위안훙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북양군벌에 둘러 싸여 있었지만 국가수반의 위치에 있었고, 혁명의 주도세력이란 자부심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대총통은 국회의 동의가 없는 국무총리의 대독일 선전포고문에 서명할수 없다고 했다.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가 하던 수법을 썼다. 실업계, 정계, 군부에서 사람들을 동원해 국회를 포위하고 협박했다. 하지만 국회는 돤치루이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돤치루이의 국무총리직 해임을 리위안훙에게 요구했다. 523일 대총통은 기세좋게 북양군벌의 실력자인 돤치루이를 해임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파벌이 장악하고 있는 산시(陝西), 산시(山西), 저장, 산둥, 즈리, 푸젠성으로 하여금 독립을 선포하게 하고, 군대를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리위안훙은 자신이 동원할 병력이 없었다. 그는 장쉰(張勳)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쉰 /위키피디아
장쉰 /위키피디아

 

장쉰은 장시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군대에 입대해 청불전쟁, 청일전쟁에 참여했고, 위안스카이를 따라 산둥성에서 의화단을 진압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청조의 신임을 받아 승진과 동시에 요직에 부임했다. 1901년 베이징 황궁 수비를 맡았고, 서태후와 광서제를 수행했다. 선통제(푸이) 3년인 1911, 강남도독에 임명되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장쉰은 난징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군을 이끌고 수비했다. 그러나 혁명군에게 패해 쉬저우로 후퇴했다. 선통제가 퇴위하고 위안스카이가 총통에 취임하자, 그는 부대 이름을 무위전군(武衛前軍)이라고 개칭하고, 청나라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을 표방했다. 그는 부대원이 변발을 자르는 것을 엄금했다. 그의 부대를 변발을 한 군대라는 뜻으로 변자군(辫子軍)라 했고, 그를 변수(辨帥), 변발한 장군이라고 했다. 일부에선 변발이 돼지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돼지꼬리 장군이라고 했다.

 

장쉰도 위안스카이의 오랜 부하였기 때문에 돤치루이, 펑궈장과 함께 북양파의 원로였다. 장쉰이 보유한 병력은 신군 3만명으로, 돤치루이나 펑궈장도 무시할수 없다. 리위안훙은 이 복고주의자에게 자신과 돤치루이 사이를 중재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장쉰은 변자군 병사 5,000명을 특별열차에 태우고 쉬저우를 출발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리위안훙은 또다른 북양파를 끌어들여 이이제의로 돤치루이를 제압하려 했지만, 장쉰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그의 계획은 복벽(復辟), 즉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리위안훙은 장쉰의 쿠데타를 촉발한 셈이 되었다.

장쉰은 리위안훙에게 돤치루이와 중재를 해줄 터이니, 선결조건으로 국회를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그제서야 리위안홍은 장쉰이 우군이 될수 없음을 깨달았다. 장쉰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총통부를 공격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리위안훙은 무력에 굴복해 위법임을 알면서도 국회를 해산했다.

 

푸이 /위키피디아
푸이 /위키피디아

 

장쉰은 베이징에 들어와 펑궈장, 입헌의회주의자인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푸이(溥儀)를 재추대하기로 했다.

푸이 나이는 11, 세상물정을 조금은 알 때가 되었다. 폐제(廢帝)는 장쉰 등 신하들의 알현을 받았다. 장쉰 등은 무릎을 꿇고 황제의 복위를 건의하자, 푸이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몰라도, 결국엔 푸이는 측근들의 권유로 복벽에 서명하게 된다. 황실의 체면상 처음엔 거절했다가 마지못해 신하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19177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는 복위한다. 이날 아침 장쉰과 캉유웨이, 왕스전 등 신하들이 청 황실의 관복을 입고 자금성에 입조했다. 장쉰의 변자군은 변발을 한 채 궁궐을 방어했다. 선통제가 퇴위한지 5년만의 일이다.

 

 

선통제 복위 기간에 베이징 천단(天壇)에 몰린 황제파와 구경꾼들 /위키피디아
선통제 복위 기간에 베이징 천단(天壇)에 몰린 황제파와 구경꾼들 /위키피디아

 

하지만 청조 복벽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양파의 양대거물인 돤치루이와 펑궈장이 의기투합했다. 지금까지 한 일들이 청조를 부활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베이징의 외교관들도 이 복벽 쇼를 한여름의 광기라고 표현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상인들이야 청 황실 색깔인 누런 천이 많이 팔려나가 좋았겠지만, 다다수 백성들은 숨을 죽이며 다음에 일어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던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자신들의 권력이 밀리고 이해관계가 부정되자 단결했다. 펑궈장은 즈리와 수도권의 병력을 동원했고, 단치루이는 자신의 예하부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양측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북양군이 띄워 올린 소형비행기가 자금성에 폭탄을 세 발 투하하는 것으로 전투는 끝나 버렸다. 이 폭격으로 가마꾼 한사람이 부상당하고 궁궐 내에서 노름을 하던 환관이 도망치자 푸이도 침실 안으로 숨어 버렸다.

712일 복벽 쿠데타의 주모자 장쉰은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도피하고, 그의 변자군은 무장해제되었다. 선통제는 다시 자금성에 유폐되었다. 이로써 청 황실의 복벽 쇼는 12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장쉰 등 복벽파를 진입하기 위해 자금성 벽을 올라타는 북양파 군인들 /위키피디아
장쉰 등 복벽파를 진압하기 위해 자금성 벽을 올라타는 북양파 군인들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하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마지막 황제, 에드워드 베어, 한마음사, 1988

Wikipedia, History of the Republic of China

Wikipedia, Manchu Rest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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