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①…청조 붕괴 후 지역 군벌 독립
중국 군벌시대①…청조 붕괴 후 지역 군벌 독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2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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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파와 혁명파 정부로 양극화…10여년간 대립후 장제스 북벌로 통합

 

중국현대사에 군인들이 설치던 시대가 있었다. 군인들이 파벌을 형성하고 힘센 파벌이 정권을 장악했다. 권력에서 밀려난 군벌들은 다른 파벌과 합쳐 권력 쟁탈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군인들은 구국의 대의명분보다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였다. 이이제이, 합종연횡, 배신과 변절이 난무했다. 2천년전 중국 땅에서 벌어진 춘추전국시대가 20세기 초에 재연된 것이다. 국민은 도탄에 빠져있고, 나라는 강대국에 잠식되어 가는데, 군벌들은 자기네 이권에 충실하며 이전투구를 벌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군벌시대(Warlord Era)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사망한 1916년부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북벌에 성공한 1928년까지 12년간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자들의 시대 구분일뿐 중국의 군벌시대는 더 앞서 시작되었고, 더 길게까지 유지되었다.

 

중국의 군벌은 위안스카이 이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1850년대 태평천국의 난 시기에 청 황실이 한족 출신의 향신들에게 진압군을 조직하도록 요청했다. 만주족의 팔기군, 한족으로 이뤄진 녹영군은 태평천국 농민군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쩡궈판(曾國藩)의 상군(湘軍)은 후난성에서, 리훙장(李鴻章)은 안후이성에서 조직되었다. 이들은 이미 중앙정부와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문신이 군대를 지휘했다. “호철불타정(好鐵不打釘), 호인부당병(好人不當兵)"이란 속담이 있다. ”좋은 쇠로는 못을 만들지 않고, 훌륭한 남자는 군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군인이 무시당하는 존재임을 의미했다.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은 글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려 했지, 군인이 되기를 꺼려 했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난 이후 한족 장군이 조직한 향용(鄕勇)에는 군인으로 입문해 지방의 고위관직에 오르는 인물이 나왔다. 무관이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가 될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상군이나 회군은 고향 단위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상하 관계가 끈끈했다. 지연과 혈연을 통해 위에서 끌고 밑에서 밀어주는 든든한 인맥을 형성했다. 출세의 지름길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리훙장의 회군은 북양군(北洋軍)의 모체가 되는데,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와해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리훙장 휘하에서 성장한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을 토대로 신군(新軍)을 훈련시키면서 본격적으로 군벌을 형성하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청일전쟁 직후 톈진 외곽에 세워진 서양식 사관학교격인 북양무비학당(北洋武備學堂)의 책임자가 되어 7,000명의 신군을 훈련시켰다. 그는 독일식으로 신군을 훈련시켰다. 이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장교들의 대다수가 위안스카이 개인에게 충성을 약속하고 그의 심복이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부하 가운데 돤치루이(段祺瑞), 펑궈장(馮國璋), 장쉰(張勳), 차오쿤(曹錕),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가 죽은 후 연이어 베이징 정권의 실권을 쥐었다.

북양파(北洋派)라 불리는 위안스카이 후계자들은 후에 즈리파(直隸派), 안후이파(安徽派) 등으로 자기 분열하지만, 중원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았다. 위안스카이의 직계조직은 그가 죽은 후 대총통과 국무총리, 총장(장관)을 배출하며 권력을 이어갔다.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중국 군벌의 아버지로서 부하들을 통해 10여년간 중국을 계승, 통치한 셈이다.

 

군벌시대의 군벌 영역도 /위키피디아
군벌시대의 군벌 영역도 /위키피디아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도 군벌화했다. 1911년 신해혁명은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부의 반란으로 촉발되었다. 이념은 부르죠아적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상인과 자본가의 추동력은 미약했다. 오히려 지방의 군인들이 청조에 반대하며 성()의 권력을 장악했고, 이들이 연합해 쑨원의 동맹회를 불러들여 난징정권을 수립했다.

우창봉기는 우발적이었다고 해도, 이후 전개과정은 남방 군부의 준동이었다. 우창에서 부사관과 사병들이 봉기에 참여했다면, 다른 성에서는 순무나 총독이 직접 혁명에 뛰어들었다. 꽝시성에서는 순무 선빙쿤(沈秉堃)이 독립을 선언하고 군사정부를 수립했다. 곧이어 광시제독 루룽팅(陸榮廷)이 성도 난닝(南寧)을 점령하고 선빙쿤을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산시(山西)성에서는 군인 출신 옌시산(閻錫山)이 성도 타이위안(太原)에서 반란을 일으켜 순무를 살해하고 군정부를 수립했다. 푸젠성에서도 장교 쉬충즈(許崇智)가 푸젠 제독 쑨다오런(孫道仁)과 손잡고 봉기를 일으켜 푸젠성 독립과 군정 수립을 선언했다.

광둥성에서는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혁명이 일어난 다른 지역과 달리, 중국동맹회가 직접 장악한 지역이다. 광저우의 상인과 향신들이 광둥성 독립을 선언하고 동맹회 간부 후한민(胡漢民)을 도독으로 추대했다. 후한민이 쑨원을 따라 난징으로 떠나자 동맹회 간부인 천중밍(陳炯明)이 그 뒤를 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제국이 멸망했다. 청제국을 무너뜨린 세력은 북방의 군부와 남방의 혁명세력이었다. 두 세력 모두 군대를 보유하고, 별도의 정부를 수립했다. 1912년 북방군벌의 대표자 위안스카이와 남부 혁명지도자 쑨원가 합의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폐위시키고 난징정부가 해산했다.

하지만 두 정부의 통합은 순조롭지 않았다. 양측의 군부는 각자 지방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혁명파 지도부는 남방의 성()에서 순무 또는 총독을 유지했고, 위안스카이와 그의 부하들은 북쪽의 성들을 장악했다.

하나의 정부 내에 사실상 두 세력이 공존한 상태였다. 따라서 두 세력 사이에 약간의 틈이 벌어지면 내란의 상태로 번질 태세였다.

19137월 위안스카이의 독주가 두드러지자 쑨원은 남부의 세력을 동원해 2차 혁명을 일으켰다. 남부의 혁명파 순무 또는 총독들이 군벌화되어 있었기에 혁명을 재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2차 혁명은 실패했다.

쑨원의 2차 혁명이 실패한후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황제 등극을 저지한 것은 남부의 군벌이다. 19151225일 윈난성의 전임도독 차이어(蔡鍔)가 군주제 복고운동을 성토했고, 그의 스승 량치차오(梁啓超)가 위안스카이의 토벌을 선언했다. 차이어는 군대를 이끌고 위안스카이의 북양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 틈에 윈난성과 구이저우성도 독립을 선포했다. 이듬해초 광시성이 독립을 선포했다. 남부 군벌의 반발이 확산되자 위안스카이는 퇴위를 선언하고 곧이어 홧병으로 죽게 된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베이징 정권은 돤치루이·펑궈장 등 북양계의 독무대가 되었고, 광저우와 서남지방엔 혁명파 군벌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권력에서 소외된 쑨원은 서남군벌을 동원해 세 번째 혁명을 시도한다.

중국은 여러 군벌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이들 세력을 크게 분류하면 베이징 정권과 광저우 정권으로 나눠진다. 베이징 정권은 청조의 군부에서 갈라진 군벌에 의해 장악되었고, 광저우 정권은 쑨원과 혁명파에 의해 조직되었다. 10여년에 걸쳐 대립한 남과 북의 군벌은 최종적으로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의 북벌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e Republic of China

Wikipedia, Warlord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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