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 멸망했는데, 일왕이 왜 죽었을까
대가야 멸망했는데, 일왕이 왜 죽었을까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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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명 천황, 화병이 나서 “신라를 쳐서 가야를 세워라”고 유언하고 운명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동은 500여년을 유지한 대가야의 본거지다. 그곳에는 400여기의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무덤 안에는 토기, 철기, 금관, 금동관, 장신구등 최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정말로 대단한 유산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무덤 하나에 한사람만이 매장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순장(殉葬)이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44호 고분에는 30여명이 죽음의 길을 같이 했다. 죽은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린딸이 함께 묻혀 있는 형상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이승에서 모시던 분과 저승에서도 함께 삶을 할수 있다는 고대인의 정신세계가 엿보였다.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문화재청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문화재청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세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5세기 이후에는 고령, 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대가야가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반파국(伴跛國: 고령지역의 소국)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했다. 대가야는 합천·거창·함양·산청·아영·하동·사천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등장했다.

대가야는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해 고구려를 침입했다. 하지만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됐고, 562년 이사부와 그의 부하 사다함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 따르면 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520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520년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고령군으로 개칭했다.”

 

한강유역과 동해안 북쪽에 대해 영토를 확장한 이후 신라의 다음 타깃은 마지막까지 버티는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주력군을 잃은후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0여년간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사부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대가야 정벌이다. 대가야는 진흥왕 23(562) 신라 이사부 장군에 의해 토벌된다.

대가야가 소멸되자, <일본서기>는 매우 슬픈 톤으로 기록했다

 

흠명(欽明) 23년 봄 6, (천황이) 가로되, “(중략) 어찌 온천하(率土之賓)의 임금과 신하(王臣)로서 사람의 곡식을 먹고 사람의 물을 마시면서 누가 이를 참아 들으며, 마음에 애도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태자와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피를 토하득 울고 원한을 품는 연고가 있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몸을 괴롭히는 노고가 따르는 것이다. 선제의 덕을 받아서 후세를 이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고 장을 빼어 같이 간역을 베고 천지의 통혹을 설욕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을 죽어서도 신자(臣子)의 도를 다하지 못한 한을 남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서기)

 

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 연맹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함락되자, 왜왕 킨케이(欽明)는 화병을 얻어 죽는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적었다.

 

흠명(欽明) 32(571) 415, 천황이 중병으로 누웠다. 황태자는 출타하고 없었다. 역마를 달려 불러들여 누은 자리에서 손을 잡고 짐은 병이 중하다. 후일의 일은 그대에게 맡긴다. 그래서 신라를 쳐서 任那(가야)를 세워라. 옛날처럼 두 나라가 서로 친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달에 천황은 드디에 내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본서기)

 

대가야가 멸망한 후에도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月光太子)에 대한 전설은 남아 있다.

월광태자는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10대손이자, 시조 아진아시왕(伊珍阿豉王)9대손이다.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은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내에 있는 국사단이다.)

아버지는 대가야의 9대왕인 이뇌왕(異腦王)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이다. 두나라가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지만 후에 신라가 동맹을 깨뜨리고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맹이 없는 법. 그후 월광태자는 승려가 돼 가야산 아래 월광사(月光寺)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월광태자를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대가야 제10대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사서의 세대 수와 전설의 세대 수에 차이가 있지만, 전설은 전설로 받아드리면 되지 않을까.

 

경남 합천군 월광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청
경남 합천군 월광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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