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③…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 병합
오키나와 역사③…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 병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8.31 03: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에 지원 요청했다가 거절당해…카이로 회담서 중국은 류큐 문제 무시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의 주역인 큐슈 사쓰마번(薩摩藩) 출신들이 류큐 병탄론을 주장했다. 1872년 사쓰마 출신의 지도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류큐국왕을 유신 축하사절단이란 명목으로 도쿄로 불러 들였다. 일본 정부는 류큐 국왕을 일본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칙서를 내리고, 류큐를 일본 외무성 관할 하에 둔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1875년 오쿠보는 외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해 청나라에 조공을 금지할 것과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맺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왕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지한 류큐국왕은 청나라에 임세공(任世功) 3명의 밀사를 청나라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3인의 밀사는 류큐가 국왕의 친서를 올리고, 당시 청나라 실세였던 리훙장(李鴻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청의 주일공사 허루장(何如章)은 류큐에 함대를 파견해 무력으로 일본을 축출하자고 강경론을 폈지만, 리훙장은 몇 개의 섬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수 없다며 외면했다. 철석 같이 믿었던 종주국의 거절에 밀사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사절단은 리훙장 관저 앞에 꿇어 앉아 류큐 신민으로 살아도 일본인으로 살수 없다. 대청제국은 조속히 출병해 류큐를 구해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그러나 리훙장 관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리훙장을 만나지 못한 임세공은 남동쪽 류큐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 후 비수로 심장을 찔러 자결했다. 청나라에 밀사를 보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본은 류큐를 먹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1879327일 일본 정부는 500명의 병력을 류큐로 급파해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 왕 쇼타이(尚泰)를 폐위시키고 도쿄로 압송해 유폐시켰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450년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류큐왕국의 마지막 왕 쇼타이 /위키피디아
류큐왕국의 마지막 왕 쇼타이 /위키피디아

 

이 소식이 곧바로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에게 전해졌다. 그는 남북전쟁 때 북군 총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고, 아시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곧바로 중국행 배를 잡아타고 56일 홍콩에 도착해 샤먼(廈門), 상하이를 거쳐 27일 텐진(天津)에 도착했다. 그는 황실의 공친왕(恭親王)과 청의 실세 리훙장(李鴻章) 북양대신을 방문했다.

공친왕은 류큐가 원상복귀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입장만 설명했다. 그러나 리훙장은 달랐다. 그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고, 국제정치의 현실적 역학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랜트는 리훙장에게 류큐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류큐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패권이 당신 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리훙장은 일본이 작은 섬 몇 개를 얻었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그랜트에게 해결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랜트는 류큐 3분할안을 제시했다.

 

1879년 리홍장을 만난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전 대통령 /위키피디아
1879년 리홍장을 만난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전 대통령 /위키피디아

 

리훙장은 힘으로 류큐를 다시 조공국으로 되돌릴수 없는 형편임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랜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일본으로 건너가 설득해 보라고 그란트에게 퉁쳤다. 그랜트는 7월 도쿄에 도착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류큐문제에 대해 중재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제의했다. 이에 이토는 류큐 병합의 정당성을 적극 해명했다. 그랜트는 813일 이토에게 류큐 3분안을 중재안으로 냈고, 리훙장에게 서한을 보낸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미국과 영국, 독일등 서양 국가들이 청나라에 군함과 무기를 지원해 류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강행할 것을 부추기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이듬해 3월 이토는 그랜트의 류큐 3분안을 변형해 류큐 2분안을 제안했다. 그랜트가 설정한 3분안 중에서 중부와 북부를 일본이 지배하고 남부의 몇 개 섬을 청이 관할하는 내용이다.

일본은 그랜트에게 도쿄에 체류하고 있는 류큐 쇼타이왕에게 복위를 권유했지만, 그가 오키나와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2분안으로 개정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18901020일 류큐 2분안을 핵심으로 하는 류큐 조약초안이 작성돼 청의 총리아문대신 선구이펀(沈桂芬)과 일본측 대표 이토가 서명했다.

이 초안이 비준을 위해 리훙장에게 넘어갔다. 리훙장은 비준에 앞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요구를 응할 경우 손해를 보고, 거절하면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일본에 대해 입장을 최대한 늦추는 무대응 지연책으로 가는 것이 최상책이다.” 그는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끝내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무대응책은 무대책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과 협상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일본의 류큐 점령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후에 량치차오(梁啓超)가 리훙장이 류큐 무대응 정책에 대해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류큐 분할안 /김현민
류큐 분할안 /김현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11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와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기 위해 모였다. 여기서 합의된 내용이 1127일의 카이로 선언이다.

카이로 선언에선 만주와 대만은 중국으로 반환되고, 조선은 독립을 회복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류큐(오키나와) 문제는 제외되었다. 그러면 왜 오키나와 문제가 카이로 선언에서 빠졌을까.

카이로 회담의 비화를 들여다보자. ··중 세 나라 정상이 모여 회담을 진행하던 중 1123일 오후 7시경. ·중 간에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루스벨트 숙소에서 열렸다. 회담이 길어져 밤 늦은 시각에 루스벨트는 류큐를 중국에게 주겠다고 장제스에게 제의했다.

장제스는 류큐는 우선 미국과 미국이 공동 관리한 후, 국제신탁통치에 위탁해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시큰둥해 했다.

이틀후인 1123일 미중 정상회담이 다시 열렸다. 루스벨트는 류큐를 다시 거론했다. “류큐의 미래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타이완에서 규슈까지 서태평양를 가르는 류큐는 중국의 안보 방파제다. 중국이 타이완만 가져가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타이완은 물론 중국 본토의 안보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에게 류큐를 놓아둘수 없다. 나는 류큐를 타이완과 펑후 열도와 함께 중국이 관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때도 장제스는 류큐를 마다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무슨 연유로 거져 주겠다는 류큐를 마다했을까. 여기에는 구구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첫째, 장제스의 마음 속에는 만주와 타이완만 있었고, 류큐는 없었다. 둘째, 장제스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얻는 것보다 중국 공산당을 궤멸시키는데 주력했다. 셋째, 장제스는 해양의 중요성을 몰랐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총통,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위키피디아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총통,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위키피디아

 

세가지 견해가 모두 조금씩 일리는 있다. 그중에서도 셋째, 중국은 해양의 중요성을 몰랐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대륙 중심의 국가였다. 오랫동안 북방 민족과 먼지 펄펄나는 중원에서 싸웠고, 당시까지만 해도 서쪽에는 공산당과, 북쪽과 동쪽에서는 일본군과 싸웠다. 아울러 명나라 이후 중국은 해금(海禁)정책을 취해왔다.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보다는 바다를 포기하는 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제스가 류큐를 얻지 못하고 우물쭈물한 것은 큰 착오였다. 지금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류큐의 최남단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뒤늦게 해양의 중요성을 깨닫을 때엔 긴 활처럼 동중국해를 가로막는 류큐 열도가 일본 영토가 된 후의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