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 조각승이 깎은 불상 4건, 보물 되다
조선의 대표 조각승이 깎은 불상 4건, 보물 되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08.3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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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덕림사 불상등 조선후기 色難의 대표작, 동시에 보물 예고

 

조선 후기에 색난(色難)이란 조각승이 있었다. 조각승(彫刻僧)은 불상을 포함해 불교조각을 전문하는 승려로, 함께 일하는 조각승 가운데 으뜸을 수조각승(首彫刻僧)이라고 한다. 색난은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도 작품을 남겼다. 서울에도 성북구 정릉 입구에 있는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이 그가 수조각승으로 지휘한 불상이다.

색난의 생몰연대는 정확치 않다. 다만 관련기록을 통해 1640년을 전후로 출생해 1660년대 수련기를 거친 후 1680년 우두머리인 수조각승이 되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약 40년 넘게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색난은 동시기 조각승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보통 유명 조각승이 평생 10건 내외로 작품을 남긴 것에 비해 색난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여건에 이른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색난이 만든 불상을 선호했고 그의 조각 기술을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솜씨가 뛰어난 장인이라는 뜻의 교장(巧匠)’ 또는 조묘공(彫妙工)’으로 불렸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흥, 화순, 강진, 김제, 구례, 광주, 해남, 영암 하동, 김해 등지의 사찰에 수화승으로 불상제작에 참여했다.

그가 만든 불상의 양식은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완만하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세 겹으로 접힌 주름이 단()을 이루면서 비스듬히 늘어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이 결가부좌한 양다리 밑으로 늘어져 완만한 곡선으로 펼쳐지고 그 뒤로 세 가닥의 옷 주름선이 규칙적으로 흘러내린다. 소매 자락은 왼쪽 무릎을 완전히 덮어 연판형(蓮瓣形)으로 처리되고, 대의(大衣)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가슴까지 올려 묶어 상단(上段)이 연판형을 이룬다.

그는 정삼품(正三品) 문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공명첩(空名帖)을 받았으며, 1709년 이후에 종이품(從二品) 문무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공명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불상제작 기술은 충옥(忠玉), 초변(楚卞), 일기(一機), 하천(夏天), 석준(碩俊), 종혜(宗惠)18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17세기 조각승 색난(色難)이 만든 대표작 4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4건은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김해 은하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이다.

문화재청은 동일한 작가의 여러 작품이 동시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될수 있도록 2018년에 관련법을 개정한 바 있다. 이번에 그 법을 토대로 색난이 만든 4건의 불상을 한꺼번에 보물로 지정하도록 예고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색난이 조성한 4건의 불교조각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문화재청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문화재청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금까지 알려진 색난의 작품 중 제작시기가 가장 빨라 그의 일대기에 있어 상징성이 큰 작품이다. 발원문을 통해 수조각승으로 활동한 40대인 1680(숙종 6)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으며, 26구로 구성된 대규모 불상이다.

실재감 있는 얼굴 표현과 넓고 낮은 무릎, 귀엽고 큰 얼굴에 크게 강조된 코의 표현 등 안정되고 아담한 조형미를 추구한 초기 제작경향을 보여준다. 세부표현에서는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으면서 전반적으로 17세기 후반 조각승들이 추구한 미의식도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색난은 17세기 후반 불교조각의 새로운 양식을 주도한 작가로 평가된다.

덕림사 불상들은 수조각승으로서 색난의 현존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작품이다. 조성 당시부터 지금까지 주요 존상(尊像)의 손실이 없고, 작품성도 뛰어나 17세기 후반 명부전 불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고흥 능가사 목조십육나한상 /문화재청
고흥 능가사 목조십육나한상 /문화재청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능가사 응진당(應眞堂)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 일괄로,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6856월 전라도 홍양현(洪陽縣) 팔영산(八影山) 능가사(楞伽寺) 승려 상기(尙機)가 발원하였고, 색난이 수조각승으로서 그의 동료제자들과 함께 주도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고흥 능가사는 색난의 본사(本寺)이자 활동의 본거지로서, 그가 오래도록 머문 사찰에서 대단위 불사를 진행하고 남긴 작품이라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응진당 불상 조성 외, 1698년 능가사 범종 시주, 1707년 능가사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간행 시주, 1730년 능가사 기와 시주 등 이곳의 다양한 불사(佛事)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주요 존상이 결실되지 않아 구성이 거의 완전하고, 나한상의 표정과 몸짓이 지물(持物, 불보살 등이 손에 지니고 있는 물건)과 잘 어우러져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어 예술성도 탁월하다.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시왕상(일부) /문화재청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시왕상(일부) /문화재청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1687(숙종 18) 제작되어 김해 신어산(神魚山) ‘서림사(西林寺) 시왕전(十王殿)’에 봉안된 불상이다. 서림사 시왕전은 현재의 은하사 명부전을 가리킨다. 은하사 명부전 존상은 모두 21구로,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 금강역사 등 거의 완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 불상은 경상도 최동부 지역인 김해 지역에 조성된 색난의 작품으로서, 주로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 영역을 파악하는데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색난이 수조각승으로 조성한 명부전 불상 일괄은 대략 4건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광주 덕림사 불상과 더불어 색난의 명부전 불상 중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의 전성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으며, 형태의 비례나 양식에 있어 아담한 체형을 추구한 17세기 후반의 조각양식과도 상통한다. 특히, 시왕상의 관모(冠帽, 모자)와 발거치대에는 용, 봉황, 코끼리, 사자 등 다양한 동물들을 수용한 창의적이고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고, 조각기법 역시 정교하고 섬세해 조각사적으로 높게 평가된다.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측면 /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측면 /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경북 예천 학가산에서 화엄사로 온 계파 성능(桂坡 聖能)이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을 중창한 후 1703년 조성한 대형 불상으로서(평균 높이 약 3.3m), 색난의 50대 만년작(晩年作)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각황전의 창건과 불상 조성은 화엄사의 역사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불사(佛事)로서, 전각명도 왕실로부터 하사받아 이때부터 장육전에서 각황전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불상 조성에 있어 숙종을 비롯해 측근 왕실인사들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계비), 경종(景宗, 당시는 세자), 숙빈최씨(淑嬪崔氏, 숙종의 후궁), 영조(英祖, 당시는 연잉군延仍君) 등을 비롯해 여흥민씨, 해주오씨 등 권세 있던 가문의 인물들도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초 최대의 왕실불사 중 하나로 꼽힌다.

불상에 재복장된 발원문에 의해 7()의 불보살상은 1703104일에 수조각승 색난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인 충옥(沖玉), 일기(一幾) 24명의 조각승이 협업해 만든 사실을 알 수 있다.

화엄사 각황전은 거대한 이층전각의 목조건물로서, 여기에 봉안된 불상 또한 규모에 맞는 웅장함과 형태미로 조성되었다. 주존불인 석가여래삼불좌상은 당당하고 묵직한 형태에 신체에 비해 큰 네모난 얼굴로 압도적이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반면, 삼불좌상의 좌우에 서 있는 사보살상은 유사한 얼굴과 비례를 보이면서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여 대조를 이룬다. 이렇듯 서로 대비되는 여래와 보살의 조형성은 전각 내부를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끄는 효과를 보이는데 이는 색난의 우수한 감각과 조각기술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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