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②…쑨원, 호법전쟁에 패하다
중국 군벌시대②…쑨원, 호법전쟁에 패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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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군벌과 합세해 북벌 개시…베이징 정권에서 펑궈장과 돤치루이 내홍

 

1912년 쑨원이 신해혁명의 성과물을 위안스카이에게 들어 바치는 것에서 분열의 씨앗이 내재해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의 열기를 무시했다. 그는 혁명파들이 제정한 헌법격인 임시약법을 폐기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규정을 만들었고, 초대 국회를 해산하고, 끝내는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쑨원은 혁명의 원칙이 회복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대총통이 된 리위안훙(黎元洪)은 북양군벌 출신의 총리 돤치루이(段祺瑞)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또다른 군벌 장쉰(張勳)을 끌어들였다. 리위안홍은 장쉰의 압력에 국회를 해산하고 폐위된 만주족 황제 푸이를 복위시켰다. 이에 북양군벌의 거두 펑궈장(馮國璋)과 돤치루이가 힘을 합쳐 만주 황제와 리위안훙, 장쉰을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쑨원은 리위안훙이 국회를 해산하자, 북양정권에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쑨원에겐 북양정권은 1912년 헌법(임시약법)을 위반한 불법 정권이었다. 그는 신해혁명의 정신을 되살려 헌법수호를 외쳤다. 이를 호법운동(護法運動)이라 한다. 혹은 쑨원의 3차 혁명이라고도 한다.

191776일 쑨원은 자신의 고향이자 혁명운동의 본거지인 광저우에 도착했다. 그는 혁명운동에 뜻을 함께 할 인사들을 불러 모았다. 해군총장 청비광(程璧光)이 북양정권을 배반하고 상하이의 주력함대인 1함대 선단을 끌고 쑨원에게 귀순했다.

쑨원은 곧바로 북양정권에 대항하는 정부 구성에 나섰다. 그는 북양정권에 의해 해산된 국회의원 100여명을 소집해 베이징 정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호법정부를 중화민국 정통 정부라고 선언했다. 쑨원의 호법 정부엔 광둥·광시·구이저우·윈난·쓰촨성 등 5개 성이 호응했다.

베이징 정부엔 대총통 리위안훙이 물러나고 북양군벌 출신의 펑궈장이 임시총통을 맡고,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 복귀했다.

돤치루이는 변법운동의 리더인 량치차오(梁啓超)를 끌어들였다. 량치차오는 장관급인 재정부장을 맡아 북양정권에 협력했다. 량치챠오는 장쉰의 복벽운동이 붕괴되고 공화제가 되돌아온만큼 돤치루이 정권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저우의 쑨원파는 돤치루이 정권이 1912년 임시약법을 위반한 불법정권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베이징과 광저우의 두 개 정부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돤치루이 /위키피디아
돤치루이 /위키피디아

 

쑨원은 앞서 두 번의 혁명이 실패한 경험을 되새겨 강력한 군사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국회의 결의로 대원수(大元帥)에 추대되었고, 휘하에 양광순열사 루퉁팅(陸榮廷)과 윈난독군 탕지야오(唐繼堯)를 원수로 거느렸다. 쑨원은 대원수였지만 자신의 지휘하는 병력은 호위병 정도에 불과했고, 병력은 서남군벌에 의존했다. 쑨원의 입장에선 남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지만, 군권을 쥐고 전쟁를 지휘하기는 처음이었다.

베이징의 돤치루이는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 하나가 일본에 14,500만 엔에 달하는 니시하라 차관(西原借款)을 얻어 군비를 확장했다. 이 차관은 조건부였다. 산둥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 넘겨주고, 내몽골과 만주에 막대한 이권을 일본에 보장하는 내용이 비밀조항으로 들어가 있었다. 돤치루이는 쑨원의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해 우선 돈을 얻어 쓰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비밀조항이 공개되면서 5·4 운동의 빌미가 된다.

또다른 하나는 19188월에 새로운 국회를 구성한 일이다. 이 국회는 돤치루이의 지지세력인 안복구락부(安福俱樂部)330석을 차지했고, 량치차오가 조직한 연구계(硏究系)20석을 얻어 돤치루이는 국회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호법운동시 광저우 군사정부의 영역 /바이두백과
호법운동시 광저우 군사정부의 영역 /바이두백과

 

남과 북의 두 세력이 준비과정을 마친 후에 본격적인 세력 대결로 들어갔다. 북양군의 동원능력이 서남부의 호법군에 비해 월등했다. 하지만 전쟁은 병력수로 하는 게 아니었다. 호법군은 혁명이란 대의와 명분을 갖고 있었다. 전국의 군벌은 제각기 명분과 실리 따지며 북양군대와 호법군대를 저울질했다.

북양군 지도부에 균열이 생겼다. 돤치루이는 무력으로 광저우의 호법정부를 정벌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임시대총통 펑궈장은 정치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 해결방법을 모색하자고 주장했다.

대총통과 총리의 견해차는 북양군벌을 갈라 놓았다. 펑궈장 휘하의 장군들은 즈리(直隷)파로, 돤치루이 휘하의 장군들은 안후이(安徽)파로 갈라졌다. 위안스카이의 수하 동료들은 두 파로 갈려 서로를 물고 늘어졌다.

1917927일 돤치루이는 펑궈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에서 쑨원 정부의 토벌을 결의했다. 돤치루이는 출병 명령을 내렸고, 쑨원도 전군을 동원해 북벌에 나섰다. 양측은 후난(湖南)성에서 대치했다.

하지만 베이징 정부에서 출병 결의가 대총통 펑궈장의 반대에 부딛쳤다. 국무회의 의결은 총통이 승인하지 않으면 효력을 발생할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총통과 국무총리의 권력투쟁을 부원지쟁(府院之争)이라고 했다.

전선에서 우페이푸(吳佩孚) 등 즈리파 장군들은 펑궈장의 지시를 받아들어 전투를 중지하고 전선을 이탈했다. 그 틈을 파고들어 쑨원의 북벌군은 주요도시에 속속 입성했다. 북방정권에 내전반대파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직을 사직했다. 펑궈장은 기다렸다는 듯 무색무취한 왕스전(王士珍)을 새 국무총리에 앉혔다.

 

돤치루이는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즈리파 장군 차오쿤(曹錕)을 접촉해 부총통 자리를 줄 터이니 호법군 토벌을 지지해달라고 요구했다. 차오쿤은 돤치루이의 유혹에 넘어갔다.

12월초 북부 10개 성의 군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투 중단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안후이파들이 서남군벌의 토벌을 주장하며 협상을 주장한 즈리파를 공격했다. 즈리파들이 수세에 몰려 있는 가운데, 자기네 파의 일원인 차오쿤이 안후이파의 편을 들었다. 회의는 예상과 달리 토벌을 지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펑궈장도 하는수 없이 돤치루이를 남부토벌군을 지휘하는 참전독판에 임명했다.

펑궈장은 화가 치밀어 자신이 작전을 지휘한다며 호위병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안후이성에서 안후이파 장군들에 의해 열차는 정지되었고, 펑궈장은 베이징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펑궈장은 다른 전술을 썼다. 그는 밀사를 서남군벌의 지도자 루룽팅과 탕지야오에게 보내 화평을 제의했다. 쑨원의 지휘를 받는 이들 두 군벌은 굳이 베이징 정권과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내 자리만 보전되고, 내 권역에 지배권만 보장된다면 내가 따라야 할 정부가 베이징이든 광저우든 상관이 없었다. 펑궈장과 내통한 두 군벌은 쑨원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북군이든, 남군이든 전투의지를 잃고 있었다. 전쟁의지는 혁명과업을 달성하겠다는 광저우 정부의 대원수 쑨원과 남쪽 정부 타도를 주장한 돤치루이에게만 강열하게 불타고 있었을 뿐이다. 베이징 정부에선 펑궈장과 돤치루이가 싸우고, 남쪽에선 쑨원과 서남군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자신의 군대가 없는 쑨원이 먼저 궁지에 몰렸다. 호법군의 양날개를 형성하고 있는 루룽팅과 탕지야오가 내전 중지와 쑨원의 하야를 요구했다.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던 장본인들이 이젠 그를 끌어내리는데 앞장 선 것이다.

1918520일 루룽팅과 탕지야오는 쑨원을 배신하고 국회를 움직여 호법전쟁의 취소를 결정했다. 쑨원을 크게 실망하고 대원수 자리를 내던지고 상하이로 가버렸다.

호법전쟁은 1년도 안 되어 막을 내리고 돤치루이도 남정을 중단했다. 돤치루이는 다시 국무총리가 되어 이번엔 즈리파 제거에 나섰다. 한때 한 솥밥을 먹던 안후이파와 즈리파는 일대 격전을 앞두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Warlord Era

Wikipedia, Constitutional Protec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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