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④…집단광기의 현장
오키나와 역사④…집단광기의 현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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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전쟁에 휘말린 류큐 후손들…총알받이로 이용되고, 집단자결 강요받았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헥소 고지’(Hacksaw Ridge)194555일 오키나와 남쪽 마에다 고지에서 벌어진 대혈투를 그렸다. 이 곳에서 양심적 집총 거부자인 데스몬드 도스가 비무장 의무병으로 전투에 참가해 부상병 75명의 생명을 구한다는 스토리다.

헥소고지 /네이버영화
헥소고지 /네이버영화

오키나와 전투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3월말부터 623일까지 3개월 남짓 전투에서 전사자만 20여만명에 달했다. 일본은 본토 사수의 마지막 거점으로 오키나와를 방어했고, 미국은 본토 공격의 교두보로 그섬을 뺏으려 했다. 오키나와에서 엄청난 희생을 내고서 미국은 더 이상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원자폭탄 투하를 결심한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가공할만한 무기가 사용된 것도 오키나와 전투 때문이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2차 세계 대전중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오키나와를 불침 항공모함이라고 선언하고,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 저지선으로 삼았다.

19453월 오키나와섬 주변에 약 1,500척의 미군 함대가 집결했다. 25일에는 일제히 포격이 시작됐다. 이때 들이닥친 미군은 지상 전투부대만 18만명이 되었고, 해군부대와 후방보급부대가지 합치면 54만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일본 수비대는 약 10만명이었으며, 그중 약 3분의1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보조병력이었다.

41일 미군은 오키나와 섬 동해안의 요미탄(讀谷)촌으로부터 자탄(北谷)정에 이르는 지점에 상륙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은 참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주민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 혹사당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전선으로 끌고 다니며 총알받이로 이용했다.

가장 큰 범죄는 주민들에게 내려진 집단 자살령이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군의 강압에 의해서 자살을 했고, 집단 자살을 택하지 않은 주민에겐 군대가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다. 1945326일과 621일 사이에 집단사망이 기록된 지역이 30곳이 넘는다. 미국 공격 당시 오키나와에는 30만 명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전투 중에 3분의 1이 넘는 10만명 이상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이 상륙한 이튿날, 미군에 포위된 요미탄의 치비치리 가마(동굴)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잡단자결을 결행해 82명이 희생됐다. 오키나와 섬에 앞서 미군이 상륙했던 게라마(慶良間) 제도에서도 집단 자결이 있었다.

가족끼리, 주민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집단자결은 미군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력을 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한다고 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반복학습의 결과였다.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제의 전진훈(戰陣訓)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침투한 결과였다.

집단자결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오키나와는 물론 패전으로 버림받은 만주 지역 거주 일본 개척주민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치비치리 가마에서 가까운 사무쿠 가마에도 많은 주민이 피난해 있었다. 여기서는 한사람도 희생되지 않았다. 사무쿠 가마에는 하와이에 돈벌러 갔다가 돌아온 노인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귀축미영(鬼畜米英)이라는 히스테리한 구호에 의심을 품고 주민들을 설득에 미군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30km 떨어진 도카시키 섬에서도 3월 집단자살이 벌어졌다. 섬 주민 절반인 약 300명이 숨졌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뒤 일본군이 미리 준 수류탄을 터뜨렸다. 불발탄이 많아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와 형제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긴조 시게아키 씨는 류큐신문에 지옥의 한 장면이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일본군 소년병 /위키피디아
일본군 소년병 /위키피디아

 

항복은 수치라고 배운 일본군은 사령부를 사수할수 없게 될 경우 돌격을 감행해 옥쇄하는 것이 종래의 전투 패턴이었다. 하지만 오키나와전에서 일본군은 사령부를 버리고 패잔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것은 오키나와전이 본토 결전을 최대한으로 끌기 위한 전략이었다. 일본군은 죄 없는 오키나와 주민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하루라도 더 오래 미군을 오키나와에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남부에 있는 많은 동굴들은 주민들의 피난장소였다. 거기에 일본군들이 들이닥쳤다. 주민들 중에는 가마에서 쫓겨나거나 저항하다가 스파이로 몰려 당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 정부가 최근 오키나와 현의 한 섬에서 발생한 집단자살이 미군 탓이라는 내용의 사회교과서 채택을 밀어 붙였다. 나라를 잃은 류큐국의 후손들은 엄청난 희생을 내고도 하소연할데도 없이 일본 역사에 함몰되고 만 것이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섬에 집결한 미 해병대 /위키피디아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섬에 집결한 미 해병대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전투는 81일 간 전개됐다. 오키나와 방어에 나선 일본군은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기 때문에 일본은 사활을 건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일본은 민간인 부대도 참여시켰다. 39,000명의 현지민 부대와 1,500명의 학생 의용대도 투입했다. 어린 남학생들의 부대에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을 부여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를 운용했다. 41일부터 525일까지 무려 1,500기의 자살 특공기가 동원됐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을 받고 20척의 미군 함선이 격침되고 157 척이 파괴됐다. 가미가제 작전에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희생됐지만, 일본은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을 막지 못했다.

64일 미 해병 6사단이 오로쿠 반도에 상륙했다. 일본 해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이길수 없었다.

620일 일본군 사령관은 오키나와섬 맨 남쪽 마부나에 밀려나 그곳에서 자살했다. 사령관은 죽으면서 이제부터 살아남은 직속 상관의 지휘 아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라고 명령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고 오키나와 현민의 희생자는 149,193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미국군측 희생도 컸다. 미군은 14,009명이 전사하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오키나와에서 한국인도 1만 명가량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에는 조선에서 온 위안부도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지상전은 오키나와에서 끝났다. 결국 본토 결전은 없었다.

오키나와 전투를 계기로 일본은 전의를 상실하지만, 일본 군부 내부에서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미국은 본토 상륙에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를 고민하게 됐다. 이 조그마한 섬에서 1만 이상을 잃었는데, 본토에서 옥쇄투쟁을 벌일 경우 수십만, 수백만의 미국인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더큰 희생을 막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은 오키나와 점령을 완료한 다음 8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곧이어 815일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태평양전쟁이 종전을 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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