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이후, 다시 활개치는 신라해적
장보고 이후, 다시 활개치는 신라해적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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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척 1천명이 쓰시마 침략하기도…후삼국 때 지방 호족에 흡수되며 소멸한듯

 

신라 원성왕 8(846)에 장보고가 살해되고, 5년후(851)에 청해진이 해체된 것은 청해진 잔당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청해진 설치기에 사라졌던 신라해적, 즉 신라구(新羅寇)가 청해진 해체 이후에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일본 사서에 나오는 몇가지를 간추려 본다.

 

869년년부터 876년까지 신라 해적이 규슈 하카타를 약탈한 기록이 <일본삼대실록>에 전한다.

869522일의 밤, 신라의 해적이 큰 배 두 척을 타고 하카타에 와서 견면(絹綿)을 훔쳐 도망쳤는데,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뒤쫓았지만 실패했다. 이에 신라 상인 윤청(潤清) 30명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다자이후(太宰府) 관내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을 모조리 무츠 등지의 내륙으로 이주시켜 구분전을 주어 귀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라는 큰 배를 만들고 나팔을 불며 군사 연습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묻자 "장차 쓰시마를 정벌하여 차지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일본 조정은 규슈에 병사 배치를 강화하고, 진구 황후(神功皇后)의 무덤에 제문을 올려 "일본은 신국이라 적국의 배는 오기도 전에 가라앉으리라"라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을 널리 퍼뜨렸다.

893511, 다자이후에 또다시 신라의 해적이 나타났다. 신라의 도적들은 히고국(肥後国) 아키타군(飽田郡)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히젠 국(肥前国) 마쓰우라군(松浦郡)에서 멀리 도망쳐 버렸다. 이듬해인 8944, 일본 조정은 신라의 해적들이 쓰시마 섬을 덮쳤다는 보고를 받는다. 다급히 연안 구니()에 경고를 보냈지만, 도적은 이미 도망가 버렸다.

89595일 아침, 쓰시마의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는 군사들을 격려해 신라 해적들의 배 45척를 쇠뇌로 무장한 수백의 군세로 맞아 싸웠다. 요시토모는 적을 유인한 뒤, 수많은 쇠뇌를 한꺼번에 쏘게 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싸움 속에서 도망치는 도적들을 추격해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한 도적 302명을 사살하고, 11척과 투구 및 갑옷, 자루를 은으로 만든 칼 및 태도(太刀) 50자루, 110, 1천 자루, 야나구이(弓胡) 110, 방패 312개에 달하는 막대한 병기를 빼앗고, 도적 한 명을 생포했다.

현춘(玄春)이라는 이름의 그 신라인 포로는, 신라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는 텅 비고 백성도 굶주리고 있으며, 왕은 곡식과 견면을 가져오라며 배 100척과 2,500명의 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증언했다.

 

일본 규슈지역 지방 조직으로 설치된 다자이후(太宰府) 유적지. 신라 해적이 이곳을 약탈했다고 일본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일본 규슈지역 지방 조직으로 설치된 다자이후(太宰府) 유적지. 신라 해적이 이곳을 약탈했다고 일본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문성왕 사후 신라는 급격하게 붕괴된다. 왕위 다툼이 격화하고, 왕손이 대가 끊겨 여왕이 등장한다. 궁예, 양길, 견훤등 지방에서 발호한 도적들이 국가를 참칭하면서 서서히 후삼국시대로 접어든다.

일본 사서에 등장하는 895년의 신라 해적은 규모가 엄청나다. 그동안에는 3, 5척등 소규모로 쳐들어가 약탈했지만, 이 해에는 45척으로 대규모화해 거의 전쟁 수준의 침략을 감행했다. 1척당 20명이 탔다고 보면, 1천명이나 되는 신라 해적이 쓰시마를 쳐들어간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 진성여왕 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성여왕 3(889)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했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해 독촉하니, 이로 인해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했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했으나, 진압군이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했다.

진성 5(891)에는 북원(北原)의 도적 두목 양길(梁吉)이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기병 백여 명으로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10여 군현을 습격했고, 6(892)에는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했다. (신라본기)

 

장보고가 사망할 무렵, 일본 조정이 신라상인들의 입국을 막은 것도 해적 활동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일본 조정은 842년 신라인의 입경을 금지했는데, 이는 일본 조정의 교역대상에서 신라를 제외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조치는 신라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신라 무역상들은 오키국, 대마도, 고토열도, 아리아케 등지로 활동을 넓혀 가던 중에 이런 조치가 나왔기 때문에 무역 충돌 현상이 빚어질수 충분한 여건이 되었다. (야마시카 마사토시, 고대 한·일 항로와 대마도)

 

일본측 사료와 한국 사료를 비교하면 대략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 임금(진성여왕)이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지에 독촉하는 장면도 비슷하다. 이제 신라는 북쪽과 서쪽 영토를 도적떼에게 떼어주고 경주를 중심으로 쪼그라들었다.

장보고 사후에 신라 해적은 일본 해역에 건너가 약탈한 것도 모자라, 자국의 황해도와 남해도 장악한 듯하다. 진성 7(893), 병부 시랑 김처회(金處誨)를 조공사절단으로 당나라에 보냈는데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파도에 휩쓸려 빠져 죽었는지, 도적떼에 잡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열전 최치원조에 치원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그즈음 당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해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가 없다.”는 구절이 있다. 서해가 해적 떼로 막혀 당나라와의 조공로, 교역로가 막혔음을 보여준다.

 

지방에서 봉기한 견훤, 궁예 등이 나라를 만들어 나가면서 해적세력들도 신라말기에 군벌화하기 시작했다.

89545척의 대형 선단으로 1천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구성되었던 신라 해적들이 10세기 이후 갑자가 사라진다. 나라의 혼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 졌는데, 해적들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지방의 도적,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세력화하면서 해적세력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수용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장보고가 앞서의 신라 해적들을 안았던 것과 비슷한 양상일 것이다.

신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해상 호족들이 많이 나타난다. 송악의 왕건 가문, 백주(황해도)의 유상희(劉相晞), 정주의 유천궁(柳天弓), 나주의 오다린(吳多燐), 영암의 최지몽(崔知夢), 혜성의 복지겸(卜智謙), 강주의 왕달규(王逢規)등이 그들이다. (권덕영, 고대 동아시아 해역의 신라 해적)

909년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나주와 진도를 정벌한 후 반남현 포구에 이르렀을 때, 압해현 해적 능창(能昌)이 갈초도 해적들과 연합해 왕건 군을 향해 진격했다. 왕건은 매복작전을 펴서 능창 등 해적 일당을 잡아 궁예에게 압송했다. 이때 능창과 갈초도 해적은 견훤을 지지하는 독자 세력으로 보인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상실된 시기에 해적과 해상세력을 구분하기 어렵다. 견훤과 궁예처럼 후에 나라를 세운 인물도 도적이었던 것처럼, 해적도 군벌화하면서 강력한 도적 세력에 대는 것이 후세에 성공의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앞서 능창이나 갈초도 해적처럼 견훤의 편에 섰다가 망한 경우도 있고, 나주 오씨 가문처럼 왕건에 줄을 서 고려 건국의 공신이 된 경우도 있다.

해상세력은 반드시 해적은 아니다. 복지겸(卜智謙)은 상당한 해군력과 경제력을 소유한 호족으로, 해적 토벌에 나서 백성들을 보호했다. 왕건도 송악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이었다.

신라말기에 곳곳에서 호족들이 독자세력화하고, 도적들이 국가를 참칭하면서 생긴 혼란은 서서히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아졌다. 해상세력의 하나였던 왕씨 가문이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개칭하면서 다시 나라를 통일한다. 신라 해적은 이런 과정에서 완전히 소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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