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③…5·4운동 촉발 돤치루이 정권
중국 군벌시대③…5·4운동 촉발 돤치루이 정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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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 얻는 조건으로 산둥반도 이권 일본에 내줘…민중운동 촉발

 

1918년 들어 쑨원이 주도한 호법운동(護法運動)이 흐지부지되면서 돤치루이(段祺瑞)를 수장으로 하는 안후이파 군벌의 위세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해 5월에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돤치루이를 지지하는 안복구락부(安福俱樂部)가 다수석을 차지했다. 8월에 새 국회가 열렸다. 국민당이 장악한 1대 국회와 달리 2대 국회는 돤치루이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돤치루이는 우선 대총통부터 바꾸었다. 대총통은 국회에서 선출된다. 돤치루이는 임시총통을 맡고 있던 펑궈장(馮國璋)을 밀어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임 대총통에 안후이파에도 쯔리파에도 속하지 않은 쉬스창(徐世昌)을 옹립했다.

쉬스창은 위안스카이와 동향인 허난성 출신으로 시운을 잘 타서 대총통에 올랐지만 소신이 있거나 휘하에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적당히 타협할줄 아는 원로였기에 돤치루이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한 후 펑궈장은 관직에서 내려와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펑궈장은 곧이어 중풍에 걸리면서 이듬해인 191912월에 사망했다. 위안스카이 밑에서 돤치루이와 한솥밥을 먹으면서 북양군벌을 이끌다가 돤치루이와 갈라서 쯔리파 군벌을 이끌던 펑궈장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돤치루이는 권력을 독차지했지만, 책임도 혼자서 져야 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 대학생들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 대학생들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8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돤치루이는 리위안훙과 펑궈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강행했다. 돤치루이의 목적은 일본에게서 차관을 얻는 것이었다. 1918516일 중국은 일본과 육군공동위조약을 체결했다. 그 댓가로 돤치루이 정부는 일본에게서 참전차관 2,000만엔을 받았다.

돤치루이는 이 돈으로 19192월에 참전군을 편성했다. 전쟁은 이미 191811월에 끝났는데 참전군을 편성한 것이다. 국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돤치루이는 하는수 없이 이 군대를 변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운용했는데, 심복 쉬수정(徐樹錚)에게 이 군대룰 주었다. 쉬수정은 변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 군대로 외몽골의 독립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조건이 달린 돈은 언젠가 꼬리가 드러난다. 그 꼬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드러났다.

1919118일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1차 대전에 대한 강화회담이 열렸다. 중국은 외교총장 루정샹(陸徵祥)을 대표로 52명의 대표단을 참석시켰다. 중국 대표들은 패전국 독일의 중국내 점령지와 이권을 반환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독일의 조차지 산둥반도 칭다오(靑島)1차 대전 중에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약소국의 주권과 권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바 있다. 당연히 칭다오는 중국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대다수 중국인들은 생각했다.

중국측 젊은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은 각종 회의에서 산둥성이 중국영토라는 사실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당연한줄 알았던 칭다오의 반환에 제동이 걸렸다. 돤치루이 정권이 일본에서 차관을 얻으면서 산둥성의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비밀조항이 발목을 잡았다. 일본 대표단은 비밀조항을 공개하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대표단을 설득했다.

베르사이유에서 돤치루이 정권이 니시하라 차관, 참전차관 등 여러 이름으로 일본에서 빌린 자금의 조건이 드러났다. 군벌은 철저하게 이 비밀을 감췄다. 안후이파는 자신의 계파 이익을 위해 국가의 이권을 양도한 것이다. 그들이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란 사실이 일본에 의해 까발려 진 것이다.

1919429,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4개국은 산둥성 문제에 관해 회의를 열고, 다음날인 430일 칭다오의 조차권과 산둥성의 각종 권리를 일본에 양도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처음부터 일본 외교관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영국은 앞서 태평양 상의 독일 식민지 분배를 놓고 일본과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산둥반도를 일본에 내주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중국을 지지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이 산둥반도 문제를 건드리면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윌슨도 일본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귀결되었다.

일본은 돈을 줄 때 그냥 주지 않는다. 조건을 차곡차곡 쌓았다가 필요할 때 그 조건을 내민 것이다. 일본은 국제관계와 계약을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대응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천진난만하고 건성건성 대응했다. 중국 사람들은 미국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으니, 우리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인들이 뒤늦게 할수 있는 것은 속았다는 분노감 뿐이었다.

 

1919년 5월, 베이징 칭화대 학생들이 일본 제품을 태우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9년 5월, 베이징 칭화대 학생들이 일본 제품을 태우고 있다. /위키피디아

 

중국인들의 분노는 돤치루이 정권의 매국적 성격, 미국의 배신적 행위에 꽃혔다. 특히 산둥성은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로 중국인들에겐 성지에 해당하는 곳이기에 분노는 더 컸다.

191954일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운집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강대국에 의해 합의된 산둥반도 결정에 반대했다. 학생들은 베르사이유에 남아 있는 중국대표단에게 서한을 보내 산둥반도와 관련한 조항이 수정되지 않으면 조약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시위대는 1917년 니시하라차관(西原借款) 도입 과정에 중국측 협상대표였던 차오루린(曹汝霖)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차오루린의 자택 앞에서 그 집에 머물던 사람을 폭행한 다음, 집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5·4 운동으로 명명된 이 시위는 중국 현대사에 최초의 민중운동으로 기록된다. 민중이 민족주의, 민중주의를 자각하고 펼친 정치운동이었다. 그동안 총과 칼을 쥔 권력자들은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으면서 국민을 개·돼지처럼 여겼다. 민중은 권력자들의 부정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1954, 중국 민중은 군벌의 매국적 행위,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분노했다. 돤치루이는 여전히 민중을 누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후이계 군벌정권은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탄압에 나서 1,0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즈리파 군벌도 돤치루이의 전횡을 성토했다.

돤치루이도 한발 물러서 책임을 아랫것들에게 돌렸다. 정권은 친일 외교관을 파면하고 일본과의 밀약을 취소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말뿐이었다. 시위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업거부 운동을 벌였고, 베이징 이외의 도시로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전국의 상점주, 공장노동자, 점포 고용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사람들은 일제 상품구매를 거부했고, 일본 증기선 승선을 중단했다. 부두하역자들은 일본 제품 하역을 거부했다. 돤치루이 정권은 마지못해 체포당한 학생들을 석방했다.

 

시위대는 파리의 중국 대표단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수천통의 전보를 날려 조약 체결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유럽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유학생들은 파리로 몰려가 대표단을 24시간 감시하며 조약에 서명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돤치루이 정권은 일본과의 밀약에 의해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하지만 군벌 정부도 혼란에 빠졌다. 베이징의 군벌 지도부는 조약 서명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그 결정을 대표단에 맡겼다.

628일 조약 서명식에 중국 대표는 참여하지 않았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국제연맹 창설을 위해 일본의 편을 들었으나, 중국 민중의 분노를 살 줄은 몰랐다. 베르사이유 강화회의 2년후인 1921, 윌슨의 후임인 워런 하딩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회의를 주도하며 산둥반도 이권 일체를 중국에 돌려주도록 일본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5·4 운동에서 보여준 중국 민중의 분노 덕분에 중국은 칭다오와 산둥반도 이권을 되찾은 것이다.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하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Wikipedia, May Fourth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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