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⑤…잃어버린 나라
오키나와 역사⑤…잃어버린 나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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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일본 고유영토 아니다” 미군기지화 주장…1972년 일본 영토 복귀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킨 이후, 오키나와 열도가 원래부터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은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서 류큐 열도는 역사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니다고 지적하며 미국의 국익을 위해 오키나와 열도를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맥아더는 오키나와를 미군기지로 만들면 일본이 재무장하지 않더라도 방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오키니와의 미군 기지화를 주장했다.

 

19524월에 발효된 대일강화조약 제3조에 의해 류큐의 법적 지위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케이스다. 류큐의 정치주권은 일본에 있었지만, 미군의 군정을 받는 변칙적인 이중종속의 지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마치 사쓰마(薩摩) 침공 이후 250년간 류큐에 대한 조공-책봉 등에서 중국의 정치적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 일본의 사쓰마 번에 의해 지배받는 이중종속구조나 다를바 없었다.

미군은 류큐 주민에 대한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을 장악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않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위치도 애매모호했다. 미국의 주권이 미쳤지만, 류큐 주민은 미국의 시민권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본 국적자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류큐 주민이 일본 본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임시방편으로 만들어낸 도항증을 지참해야 했다. 도항증에는 국적 표시가 없고, 류큐 열도 거주자라는 법적 신분만 기재되었을 뿐이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이유는 소련과 공산화한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설정하고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해상 항공모함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양도하기 이전까지 27년간 류큐는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군사기지였을 뿐이다. 오키나와 주민은 미국의 안중에도 없었다.

미군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오키나와에 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토지를 강제로 수용했다. 전후 미군은 생존 주민을 1년간 16개 지역 수용소에 감금하고 토지를 강제 접수했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는 서태평양에서의 관타나모(쿠바) 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45년 6월 27일, 오키나와섬을 점령한 미군 /위키피디아
1945년 6월 27일, 오키나와섬을 점령한 미군 /위키피디아

 

오키나와는 한국전쟁 때 미군의 전략상 공격기지 및 후방지원 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60년대 초부터는 베트남 전쟁의 후방기지로 역할을 했다.

19652월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 개입하면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단행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량의 지상 전투부대를 투입해 베트남 전쟁을 확대했다. 이렇게 되자 오키나와는 베트남 전쟁의 최전선기지가 되었다. 북베트남 폭격이 시작되자, 오키나와는 군수물자와 군인을 가득 실은 군용트럭, 탱크가 주요 도로와 항구를 메웠다. 공군기지에는 수송기와 폭격기가 연일 베트남 쪽으로 날아갔다.

미국의 잡지 포린어페어스 편집장은 만일 오키나와를 자유롭게 사용할수 없었다면, 미국은 지금과 같은 규모로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오키나와 없이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으로 불렀다.

요코스카, 이와쿠니, 사세보 등의 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도 베트남 출병에 앞서 오키나와를 경유했다. 오키나와은 미일 안보조약이 적용되는 지역이 아니므로, 공항과 항만, 도로의 사용을 일본과 협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가장 많을 때 한국전쟁 당시를 웃도는 55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투입했지만, 결국 좌절을 맛보았다.

 

류큐왕국의 슈리성 /위키피디아
류큐왕국의 슈리성 /위키피디아

 

1960년대 후반에 들어가 미국이 2차 대전 승전국으로서의 지위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졌고,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어 갔다.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눈부시게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미국은 전비를 일본에 전가할 필요가 있었다.

1969년의 닉슨독트린은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아시아는 아시아인 손으로라는 구호가 제창됐다. 이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갖고 류큐를 일본에 반환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1972515일 마침내 미국은 류큐 군도와 인근의 광대한 해역을 일본에게 통째로 넘겨줬다. 하지만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군 기지에 대한 사용권에는 지금까지 조금도 제한을 받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그때 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오키나와의 보수세력인 교원노조가 중심이 되어 일본에 복귀하는 것을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사 집단은 주민을 집단자살하게 한 황민화 교육에 앞장선 친일파 그룹이었으며, 이들이 나중에 오키나와의 원로급으로 성장해 일본으로의 복귀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독립이라는 말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에서 독립에 관한 주민투표가 진행될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 중 상당수는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상당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땅에 일본 내 미군기지의 73.8%가 밀집해 있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를 독립시켜 과거의 류큐국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대다수의 오키나와 현민들은 스스로 일본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독립론도 연구 수준에 불과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오키나와 열도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열도 /위키피디아

 

그러면 근세에 비슷한 길을 걸었던 한국이 독립하고, 류큐는 독립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민족에겐 선조들의 항일 운동이 독립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연합국의 한 축인 중국 지도자들, 특히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1943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이 한국에 대해 미 영 중의 3국 신탁통치안을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약속을 발표하자고 제안해 관철시켰다. 장제스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일컬어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윤봉길 의거 이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장제스는 할 일 없는 망명객들이 내부 투쟁이나 일삼는 집단으로 여기고 한푼도 돕지 않았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가 폭탄 한 방으로 침략군 사령부를 일거에 섬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제스는 물심 양면으로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카이로 회담 직전인 1943726일 장제스는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국과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에 명문화된 것은 윤봉길 의사에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류큐에는 윤봉길 의사가 없었다. 류큐인들은 뚜렷하게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 독립의지나 실천이 미약했다. 그 결과로 류큐국은 잃어버린 나라가 되어버렸다.

 

류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아 있다. 우리 역사에는 중국·러시아의 대륙과 미국·일본의 해양을 연결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이 영향을 미쳤다면, 류큐 역사에는 중국 대륙을 포위하는 해양 열도라는 지정학적 이해 관계가 녹아 있다. 이 지정학이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의 패권싸움이 오키나와의 남단 센카쿠 열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키나와, 즉 류큐의 역사는 힘이 없는 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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