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⑤…1차 봉직전쟁, 우페이푸 승리
중국 군벌시대⑤…1차 봉직전쟁, 우페이푸 승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4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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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리파와 펑톈파의 동거, 2년만에 파경…9일간 전투에서 장쭤린 완패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후 4년간 베이징 정권을 차지한 돤치루이는 오만했고, 독선적이었다. 그는 권력을 농단하며 자기 파벌 육성에만 집중했다. 돤치루이의 이기주의는 적을 양산했다. 안으로는 북양군벌 내에 차오쿤, 우페이푸 등 즈리파의 반발을 샀고, 만주군벌 장쭤린의 견제를 받았다.

돤치루이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즈리파와 펑톈파의 연합세력이었다. 1920년 두 군벌은 안직전쟁에서 돤치루이의 안후이파를 제거한 후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두 세력의 권력 공유는 평탄하지 않았다. 국가재정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느냐, 중앙의 관료과 지방관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그들은 이리와 늑대처럼 대립했다. 이권과 자리, 돈의 배분은 두 파벌의 공존을 2년을 넘지 못하게 했다. 결국 먹을 것을 놓고 두 맹수는 피를 튀기는 전투를 벌였으니, 이를 봉직전쟁(奉直戰爭) 또는 펑-즈 전쟁(ZhiliFengtian War)이라고 한다. 봉직전쟁은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전쟁이 1922, 2차 전쟁이 1924년에 일어났다.

 

안직전쟁 이후 돤치루이가 대총통으로 옹립한 쉬스창(徐世昌)은 재빨리 변신해 자리를 유지했다. 쉬스창은 직계와 봉계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면서 타협적 태도로 일관했다. 총리 자리는 안후이파에 속해 있다가 잽싸게 즈리파로 돌아선 진윈펑(靳雲鵬)이 꿰어 찼다. 이유 있는 배신, 적절한 기회주의는 때론 난세를 살아가는 기술이기도 하다.

즈리파(直派)와 펑텐파(奉派)는 사사건건 인사문제로 부딛쳤다. 안후이 독군의 자리가 비자 장쭤린은 사돈인 장쉰(張勳)을 추천했지만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은 장원성(張文生)을 밀었다. 최종 낙점은 직파의 후보 장원성이었다. 장쑤 독군 후보에도 장쭤린은 또다시 장쉰을 밀었고, 차오쿤은 자파 소속 치셰위안(齊燮元)을 추천했는데, 이번에도 즈리파가 승리했다.

장쉰은 청 황실을 복위시키려 하다가 실각한 장군이었는데 장쭤린이 이런 사람을 중용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장줘린은 자신의 요구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건의가 묵살당한 사실을 가슴 속 깊이 담아 두었다.

돤치루이가 실각하면서 안후이파도 붕괴에 직면했다. 한 울타리에 있다가 갈라진 즈리파는 안후이파의 전멸을 원했지만 펑텐파는 안후이파의 일부를 살려두어 즈리파를 견제하도록 하는 구조를 희망했다.

안후이파의 처리를 놓고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에 견해차가 드러났다. 회의에서 우페이푸는 돤치루이를 반역자라면서, 군법회의에 회부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타박을 주었다. 어디 감히 사단장급이 군수뇌부 회의에 참석해 떠드느냐는 식이었다. 장쭤린은 동북3성의 주인으로,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과 상대해야 하는데, 우페이푸와 같은 조무래기가 강경발언을 하는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장쭤린 초상 /위키피디아
장쭤린 초상 /위키피디아

 

장쭤린과 우페이푸의 갈등에는 봉파와 직파의 이해관계도 있었지만, 정통 군인과 마적 출신이라는 사적 감정도 개입되어 있었다.

우페이푸(吳佩孚)는 산동성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고 22세에 과거에 합격해 수재(手才)가 되었다. 그는 관료를 선택하지 않고 군인의 길을 갔다. 북양무비학당, 바오딩육군속성학당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하던 중에 차오쿤을 상관으로 만났다. 정규 코스를 밟은 우페이푸의 눈엔 마적질을 하다 어느날 갑자기 출세한 장쭤린이 군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장쭤린(張作霖)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 도적질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는 고향에서 향촌 주민들이 조직한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했다. 자경단은 청말 혼란기에 마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직되었지만, 실제론 다른 마을 습격하며 도적질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장쭤린은 마을 불량배들을 조직화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이때 그와 함께 비적질을 한 동료가 장쭤샹(張作相), 탕위린(湯玉麟), 장징후이(張景惠) 등 펑텐파의 핵심인물이 된다.

당시 동북3성의 총독은 쉬스창이었다. 쉬스창은 장쭤린을 불러 펑톈성 한 지방의 통령으로 임명했다. 통령은 여단장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그때 장쩌린의 나이는 32세였다. 이후 장쩌린은 펑톈군에서 혁혁한 공적을 냈고, 빠르게 진급했다.

마적부대를 정규군으로 만들어 준 쉬스창은 마침내 대총통이 되었다. 쉬스창은 옛정을 잊지 않고 장쭤린을 동3성 순열사에 임명했다. 이로써 장쭤린은 만주의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쭤린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정규코스를 밟지 못한 군대 승진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북양군벌의 실세 차오쿤과 사돈관계를 맺으며 상류사회에 진입하려고 했었다.

즈리파의 2인자 오페이푸는 이런 장쭤린이 보기 싫었다. 오페이푸는 베이징을 벗아나 허난성의 뤄양(洛陽)으로 근거지를 옮겨 군대를 훈련시키며 중앙정치에서 다소 거리를 두었다.

 

장쭤린과 오페이푸의 불화가 불거진 것은 국무총리 진원펑이 재정난을 책임지고 192112월 사퇴하면서부터였다. 장쩌린이 진원펑의 후임으로 교통은행 이사장이던 량스이(梁士诒)를 추천했고, 쉬스창과 차오쿤도 이에 동의했다. 량스이는 청말 관료 출신으로 철도와 재정 분야에서 오래 일해온 경제통이었다. 나라의 살림살이가 궁핍하니, 이런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량스이가 국무총리가 되어 한 첫 번째 일이 돤즈구이(段芝貴) 등 안후이파 6명을 사면한 것이다. 안후이파 사면은 장쭤린이 원했던 것이고, 오페이푸로선 참을수 없는 일이었다. 량스이는 또 즈리파에게 지급하기로 되어 있는 군비 300만 위안의 지급을 미루며 주지 않았다. 신임 총리에 대해 즈리파의 불만이 쌓여 가는데, 좋은 건수가 하나 잡혔다. 국무총리 량스이가 국익에 반해 일본에 손을 내민 것이다.

 

1922년 차오루린(曹汝霖)과 루쭝위(陸宗輿)가 베이징시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두 사람은 19195·4운동 시위대에 의해 나라의 이권을 일본에 내어주고 차관을 얻으려 한 매국노로 규정된 인물이었다. 량스이가 이 두 사람을 앞세워 베이징의 공유자산을 담보로 잡고 1,000만 위안을 빌렸다. 차주는 일본이었다.

이 사실을 우페이푸가 알았다. 우페이푸는 량스이와 장쭤린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문을 휘하의 장군에게 보내고, 량스이 총리에게도 보냈다. 총리는 자신의 취임을 축하하는 전문일줄 알고 열어보았는데, 자신을 타도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남녀노소와 전국의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우페이푸의 전문에 조선의 이완용이 언급된 점이 이채롭다. 이완용은 중국에서도 매국노의 상징으로 인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량스이는 돤치루이가 한 짓을 재연했다. 그는 중국의 이권을 넘기고 일본과 비밀계약을 체결하려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량스이와 그 배후에 있는 장쭤린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량스이는 국무총리에 취임한지 한달도 채우지 못하고 1922125일에 사직서를 던져버리고 텐진으로 줄행랑을 쳤다.

우페이푸와 장쭤린의 긴장관계가 고조되었다. 장쩌린은 우페이푸에게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복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우페이푸는 받아들일수 없었다. 치셰위안, 텐중위(田中玉), 펑위샹(馮玉祥) 등 즈리파 군벌들이 우페이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펭텐파 군인들 /위키피디아
펭텐파 군인들 /위키피디아

 

먼저 군대를 동원한 것은 장쭤린이었다. 펑톈군은 11922331일 산하이관을 넘어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43일 우페이푸는 즈리파 지휘관 400명을 뤄양으로 초청해 장쭤린 토벌을 선언하고 출병 명령을 내렸다. 차오쿤은 장쭤린과 사돈을 맺었지만, 막상 양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자신의 수하 우페이푸를 지지했다.

승부는 쉽게 판가름났다. 장쭤린은 일제 최신 무기를 많이 보유했지만, 마적단의 잔재를 떨치지 못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장쭤린의 부대는 정예 북양군대에겐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1922410일부터 18일까지 9일간의 전투로 1차 봉직전쟁은 끝났다. 즈리군은 10만명이 참여하고 펑톈군은 그보다 많은 12만명이 참전했다. 펭톈군은 산하이관으로 도망쳤다. 벌판은 펑텐군 병사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장쭤린은 간신히 몸을 피해 펑텐으로 도망쳤다.

일본의 관동군이 즈리군의 산화이관 돌파를 묵인하지 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즈리군은 일본과의 교전을 피해 만주로 진입하지 않았다. 다만 우페이푸는 쉬스창 총통에게 장쭤린에게 엄벌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장쭤린에게 군복을 입혀준 쉬스창은 이번에 장쭤린을 모든 직위에서 파면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동북3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펑톈군 총사령관에 올라 권력을 유지했다.

이로써 우페이푸와 장쭤린의 첫 번째 승부는 우페이푸의 승리로 끝났다.

 


<참고자료>

Wikipedia, First ZhiliFengtian War

나무위키, 1차 직봉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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