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⑥…천중밍, 쑨원을 배신하다
중국 군벌시대⑥…천중밍, 쑨원을 배신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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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민, 연방주의 주장…쑨원, 군벌 기득권 인정하는 주장으로 인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쑨원은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에서 혁명가이자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에 비해 천중밍(陳炯明)은 중공에서는 반역자, 국민당에선 배신자로 낙인 찍혀 있다. 혁명동지였던 두 사람은 후에 왜 극단의 평가를 받는 것일까.

 

천중밍은 쑨원과 같이 광둥성 출신으로 쑨원에 비해 12살 아래다. 광둥성 하이펑(海豐)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유학을 공부해 20살에 과거에 합격, 수재가 되었다.

그가 혁명운동에 뛰어든 것은 31살이 되던 1909년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하면서부터다. 1910년 천중밍은 광저우에서 후한민(胡漢民)과 함께 봉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1911년에 4월 황싱(黃興)과 함께 양광총독부를 공격하다가 실패해 홍콩으로 도주했다. 191111월 신해혁명 때 그는 광둥성을 차지하고 광둥 도독이 되었다.

천중밍은 오랫동안 쑨원과 행동을 함께 했다. 위안스카이의 독주에 반발해 쑨원이 2차 혁명(1913)을 일으키자 천중밍도 이에 가세했다. 쑨원의 2차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천중밍도 광둥에서 축출되어 홍콩으로 망명을 떠났다.

천중밍이 다시 광둥성을 차지한 것은 1917년이다. 쑨원이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전개하자, 천중밍도 다시 쑨원의 운동에 동참했고, 광저우를 차지해 광둥성장이 되었다. 쑨원이 루룽팅과 탕지야오의 배신으로 호법전쟁을 끝내고 상하이로 달아나게 되었다. 그러자 천중밍은 루룽팅을 쫓아내 광둥(廣東)성을 되찾고 광시(廣西)성까지 손에 넣어 양광(兩廣)의 막강한 군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천중밍 /위키피디아
천중밍 /위키피디아

 

천중밍은 광저우봉기, 신해혁명, 2차혁명, 호법운동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쑨원을 지지하며 동참했다. 천중밍은 몸소 혁명군을 조직해 전투에 참가했고, 승리를 하거나 패배를 하면서 쑨원의 운동과 궤를 함께 했다.

두 사람의 정치철학은 같았으나 방법론에서 달랐다. 쑨원은 무력으로 북양정권을 붕괴시키고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천중밍의 생각은 각 성()이 자치를 하면서 연방제로 중국을 이끌자는 것이었다. 천중밍은 미 합중국처럼 독립된 성들의 연합”(United States)을 구성하면 군벌 전쟁이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연방정부의 초대 집정(執政)에 쑨원을, 부집정에 돤치루이(段祺瑞)를 뽑자고 주장했다.

쑨원의 시각에선 천중밍의 주장이 전국의 군벌체제를 인정하는 타협론으로 보였다. 천중밍이 광둥·광시의 두 성을 가진 군벌로서 북벌이니 통일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보다는 중국의 일정 지역에서 편안하게 주인 노릇만 하려 한다는 게 쑨원의 평가였다.

쑨원의 생각이 맞을수도 있다. 천중밍의 주장대로라면 동북3성은 장쭤린의 영토이고, 즈리파의 우페이푸는 후난을 갖게 된다. 산둥성, 산시성, 윈난, 쓰촨도 그곳의 군벌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중국이란 나라는 여기저기 나눠먹은 군벌들의 연합국이 되는 것이다. 유럽의 봉건영주들이 이리저리 땅을 차지해 독립영지를 운영하다가, 오늘날 EU라는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한 것과 비슷한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다.

천중밍은 즈리파의 실세 우페이푸로부터 연대제의를 받았다. 이에 반해 쑨원은 만주군벌 장쭤린과 남과 북에서 즈리파를 동시에 공격하는 내용의 비밀동맹을 맺었다. 북방 군벌과 서로 다른 채널로 비밀스런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한때 동지였던 쑨원과 천중밍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 갔다.

 

상하이에 머물던 쑨원이 북벌을 하려면 천중밍의 군사력에 의지해야 했다. 천중밍 휘하의 군대는 3만명에 이르렀다. 쑨원은 천중밍에게 북벌에 참여할 것을 여러차례 종용했다. 하지만 천중밍은 쑨원의 요구를 거절했다.

1922321, 쑨원의 참모장이자 북벌의 자금책이던 덩컹(鄧鏗)이 홍콩을 방문하고 돌아오다 광저우역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천중밍이 있었다. 쑨원은 천중밍을 광둥성장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외교부장 우팅팡(伍廷芳)을 임명했다.

쑨원은 그해 5월에 북벌에 반대하는 천중밍을 제거하고 광둥, 광시, 윈난성의 군벌들을 규합해 북벌에 나섰다. 이에 천중밍은 쑨원에게 북벌에 참여할 터이니, 총사령관 자리를 달라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쑨원은 이마저 거절했다. 북벌군은 장시성으로 향해 성의 절반을 점령했다.

 

쑨원과 쑹칭링(1915) /위키피디아
쑨원과 쑹칭링(1915) /위키피디아

 

마침내 천중민이 쑨원의 등 뒤에서 칼을 들이밀었다. 1922613일 천중밍은 4,000명의 군대를 광저우 교외에 주둔시켰다. 천중밍의 반란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쑨원은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광저우 총통부로 급히 돌아왔다. 쑨원의 곁에는 임신을 한 아내 쑹칭링(宋慶齡)이 지켰다.

쑨원은 천중밍에게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천중밍은 코웃음치며 오히려 총통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16일 새벽 3,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반란군이 광저우 주요도로와 관청을 점령하고 총통부를 공격했다. 막 잠이 들었던 쑨원은 호위병의 소리에 일어났다. 부하들은 쑨원에게 대피할 것을 요구했다. 쑨원은 거부했다. 부하들은 떠밀다시피 쑨원을 끌고 탈출시켰다.

이때 아내 쑹칭링은 남아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쑹칭링은 중국에는 제가 없어도 되지만, 당신은 꼭 있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쑨원은 아내이 고집을 꺽지 못하고 비서와 호위병만 데리고 탈출했다.

쑹칭링은 남은 병력과 함께 반란군과 싸웠다. 총통부가 함락되기 직전에 쑹칭링은 호위병과 함께 간신히 빠져나와 인근 광둥대학 총장 집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이때 충격으로 쑹칭링은 유산했고, 이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쑨원은 해군총장 원수더(溫樹德)의 덕분에 황푸강변에 대기중이던 군함 융펑(永豐)호에 올라탔다. 쑹칭링도 뒤늦게 융펑호에 올라 남편과 재회했다. 이 사건을 6·16사변 또는 영풍함사건이라고 한다.

쑨원은 천중민의 토벌을 명령했다. 고향애 내려가 있던 장제스(蔣介石)는 반란 소식을 듣고 급히 광저우로 돌아와 쑨원에 합류했다. 하지만 광저우의 위수사령관, 해군총장이 쑨원에 등을 돌리는 바람에 그는 광저우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

즈리파의 우페이푸는 천중민의 광둥·광시 지배권을 인정했다. 쑨원은 천중민 무리를 즈리파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했다.

 

천중밍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쑨원의 지시로 쉬충즈(許崇智)가 북벌을 중단하고 광저우 탈환에 나섰고, 윈난·광시에서도 토벌군이 밀려왔다. 19232월 쑨원이 광저우에 입성하자 그는 광둥 동부로 쫓겨가 있었다. 1925년 쑨원이 죽은 후에 그는 장제스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고 홍콩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홍콩에서 1933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자료>

김세호, 中國統一芻議(1927)의 재검토 陳炯明聯省自治論의 성격, 2009, 한남대

Wikipedia, Sun Yat-sen

Wikipedia, Chen Jiongming

나무위키, 천중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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