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의 흑역사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의 흑역사
  • 아틀라스
  • 승인 2019.05.2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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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사태, 비인간적 노동으로 점철, 그러나 미국 동서 통합의 계기

 

테오도르 유다(Theodore Judah)라는 젊은 토목기사는 미친 유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미쳐 있는 것은 미국 동안과 서안을 있는 대륙횡단철도였다. 유다는 남북전쟁이 막 시작된 1861년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를 탐사하고 열차가 지나갈 경로를 찾아냈다. 그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원·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설계도를 들이 밀었다. 전쟁이 끝나면 미국을 통합할 수단이 대륙횡단철도라는 사실은 링컨도 잘 알고 있었다. 링컨은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1862년 철도법에 서명했다.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몬토리 서밋에서 열린 대륙횡단철도 연결식. 악수하는 이는 사뮤엘 센트럴퍼시픽의 새무얼 몬태규(Samuel S. Montague, 왼쪽)와 유니언퍼시픽의 게렌빌 닷지( Grenville M. Dodge, 오른쪽). /위키피디아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몬토리 서밋에서 열린 대륙횡단철도 연결식. 악수하는 이는 사뮤엘 센트럴퍼시픽의 새무얼 몬태규(Samuel S. Montague, 왼쪽)와 유니언퍼시픽의 게렌빌 닷지( Grenville M. Dodge, 오른쪽). /위키피디아

 

이렇게 해서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이 시작된다. 미국은 당시 캘리포니아를 손에 넣었지만,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황무지를 지나갈 경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인디언의 공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바다로 가는 길도 험난했다.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의 거센 풍랑을 헤치며 멀리 돌아야 했고, 말라리아 위협을 감수하고 파나미 지협의 열대우림을 지나야 했다.

두 회사가 도전에 나섰다. 유다가 설립한 센트럴퍼시픽(Central Pacific)과 동부에서 출발할 유니언퍼시픽(Union Pacific)이었다. 센트럴퍼시픽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출발, 서쪽으로 철도 공사를 하고, 유니언퍼시픽은 동에서 서로 공사를 해서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이 연방정부와 약속이 되었다.

완성된 구간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난이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평탄한 선로는 1마일당 16,000달러, 경사진 땅은 마일당 32,000달러, 산맥을 통과하는 땅은 마일당 48,000달러였다. 게다가 선로를 1마일 공사할 때 철도연변에 25의 땅을 주는 조건이 더해졌다. 이 조건은 후에 52로 불어났다. 철도가 건설되면 인근 땅은 요즘 용어로 역쇄권이 형성된다. 도시가 들어서고 공장과 상가가 세워진다. 당연히 땅값이 올라간다. 이런 수지맞은 장사를 투기자본이 놓칠리 없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시작해 선로 공사가 얼마나 나가느냐에 따라, 공사비와 그 주변의 땅이 주어진다.

 

공사구간 /위키피디아
공사구간 /위키피디아

 

세기의 경쟁이 펼쳐졌다. 서부 센트럴퍼시픽에는 서부의 부자 4명이 달라붙었다. 4명중에는 상인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가 포함되었다. 동부 유니언퍼시픽에는 월가의 투자가 토머스 튜란트(Thomas C. Durant)가 지휘했다.

테오도르 유다 /위키피디아
테오도르 유다 /위키피디아

 

출발은 서부가 빨랐다. 18631, 센트럴퍼시픽은 대륙횡단철도 개입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그들은 미친 유다의 지휘 아래 새크라멘트에서 철도를 깔기 시작했다. 처음 32km는 비교적 순탄했지만, 곧바로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야 했다. 철도에 들어갈 침목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 조달하면 되었지만, 철강재와 부수 물자는 동부에서 가져와야 했다. 서부의 산업은 아직 취약했다. 돈이 급격하게 빨려 들어갔다. 4명의 투자자가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 해도 엄청나게 들어가는 자금을 대기 어려웠다. 부동산이고 뭐고 모두 담보로 내놓았지만, 금새 거덜났다. 정부 지원금은 후불제여서 초기공사비를 대지 못했다.

그때 테오도르 유다는 뉴욕에 건너가 대규모 투자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서둘러 서부 공사장으로 가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게 다였다. 유다는 황열병에 걸려 공사를 186311월에 사망했다. 그때 나이는 37.

 

동부의 사업자 유니언퍼시픽은 서부보다 조금 늦은 186312월에 출범했다. 사업 책임자 듀란트는 탐욕스러운 사업가였다. 그는 개인이 10%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니언퍼시픽의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차명으로 빼돌려 회사 경영권을 장악했다. 게다가 크레딧 모빌리어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유니언퍼시픽과 내부거래를 하면서 자금을 빼돌려 사익읅 취했다. 최고 토목기사로 채용된 피터 데이는 듀란트의 음모를 알고 1년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탐욕스런 자본이 결합하면서 동과 서의 사업자들은 본격적으로 철로공사에 들어갔다. 초기에 혼선은 있었지만, 서부 센트럴은 스탠포드가 사실상 경영권을 쥐고 공사를 밀어 부쳤고, 동부 유니언은 남북전쟁의 영웅 그렌빌 닷지(Grenville M. Dodge) 장군을 총감독으로 임명해 전투를 치르듯 공사를 민첩하게 움직여 나갔다.

 

데일 크리크 다리(Dale Creek Bridge) /위키피디아
데일 크리크 다리(Dale Creek Bridge) /위키피디아

 

동부 유니언의 공사는 인디언들의 영토를 지나갔다. 수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은 오랫동안 백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많은 피를 흘렸다. 경찰력이 공사장에 투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부들은 총을 옆에 두고 작업을 했다. 공사를 지휘하는 닷지 장군은 악명 높은 케이스먼트 형제를 고용해 인부 감독과 인디언으로부터 공격을 맡겼다. 동부의 공사는 처음에는 하루 800m 밖에 진도가 나가지 못했지만, 1년이 지나면서 하루에 4.8km씩 앞으로 나아갔다.

동부 유니언이 인디언 수족을 처음 부딛친 것은 1866년 여름이었다. 악명 높은 추장 점박이꼬리(Spotted Tail)가 이끄는 무리가 다가와 철마와 달리기 경쟁을 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인디언 기마병이 철마를 이기지 못했다. 화가 난 추장은 식량을 달라고 했다. 거절하자 그들은 위협적인 언사를 뱉어내고 사라졌다.

그후 인디언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공격에 열차가 탈선하고 선로가 뜯겨 나가고 인부들이 공포스럽게 살해되었다. 수족은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승객도 공격했다. 어떤 인부는 머리가죽이 벗겨졌고, 어떤 이는 화살이 19개나 꽃힌채 죽었다. 공사장에 앞서 나가는 측량사는 인디언 공격에 가장 취약했다.

공사장 인근 도시에는 환락가가 만들어졌다. 인부들은 공사판에서 번 돈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구하고 도박을 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무법지대 장면이 공사장 곳곳에서 나타났다. 공사장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은 유니언퍼시픽이 불하받은 구역내에 들어와 사업을 했다. 분노했다. 그들은 불법으로 토지를 점거해 술집을 만들고 도박장을 차렸다. 닷지 장군은 분노해 케이스먼트 형제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케이스먼트 형제는 인부 200명을 중무장시키고 유흥가로 달려가 마음껏 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30명의 인부가 죽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순직으로 처리되었다.

 

한겨울에 철도작업을 하고 있는 중국인들 /위키피디아
한겨울에 철도작업을 하고 있는 중국인들 /위키피디아

 

동부의 공사는 구인난에 시달렸다. 인부를 채용하면 달아났다. 공사구간이 험난하기도 했지만, 인근에 철도공사판보다 더 많은 봉급을 주고 처우가 좋은 광산이 많았다. 힘들게 2,000명의 인부를 구해 공사장에 투입하면, 1,900명이 달아났다.

드디어 동부의 센트럴은 중국인 인부를 인부로 쓰기로 했다. 1948~49년 골드러시 때 건너온 중국인 인부들이 캘리포니아엔 5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 처음엔 경영진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백인들은 중국인을 비속한 인종으로 취급하고 있었고, 작업을 게을리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도 워낙에 인력난이 심하다보니 중국인 50명만 써보기로 했다. 웬걸, 그들은 일을 너무나 잘했다. 아무런 군소리도 없이 힘들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센트럴 경영진들은 중국인들을 더 많이 고용하기로 했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은 중국인에게 맡겼다.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넘어가는 산맥에는 깎아진 절벽에 다리공사도 많았고, 숱하게 터널을 뚫어야 했다. 중국인 인부들은 중국식 바구니를 타고 절벽에 붙어 돌을 깨고 구멍을 냈다. 이젠 위험이 노출된 공사는 중국인에게 맡겨졌다. 숱한 중국인이 절벽에서 목숨을 잃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그 무렵 도입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약은 다루기가 위험했는데, 그 일을 중국인에게 맡겼다.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터널작업을 하던중에 사고가 났다. 아무리 순종적인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폭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혹한이 다가왔다. 시레라네바다 산맥의 겨울은 매서웠다. 따듯한 푸젠(福建)성 출신이 대대수였던 중국인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들이 얼마나 얼어 죽었는지 자료도 없다. 소모품이었으니까. 10톤의 중국인 유해가 배에 실려 중국에 보내졌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쿠리(coolie)라는 비속어로 불리웠다.

(나중에 센트럴퍼시픽의 스탠포드는 공사가 끝난후 중국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샌프란시스코에 거주지로 차이나타운을 기부하고,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해 일정비율의 중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마지막 대못을 박는 그림(Thomas Hill, 1881) /위키피디아
마지막 대못을 박는 그림(Thomas Hill, 1881) /위키피디아

 

이런 험난하고 비인간적이며, 투기적인 공사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동과 서에서 시작한 공사는 1869510일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 프로몬토리 서밋(Promontory Summit)에서 마지막 대못을 박았다. 새크라멘토에서 개업식을 한지 6년만이다. 그동안 서부의 센트럴퍼시픽이 새크라멘토에서 1,110km, 동부의 유니언퍼시픽은 오마하에서 1,747km를 연결했다. 동부 유니언퍼시픽의 승리였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지긋지긋하던 남과 북의 전쟁도 끝났고, 이제 미국은 동과 서를 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도너 서밋의 터널(센트럴퍼시픽 구간) /위키피디아
도너 서밋의 터널(센트럴퍼시픽 구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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