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축조에 바친 인간 제물은 얼마나 될까
경주 월성 축조에 바친 인간 제물은 얼마나 될까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09.0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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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에 이어 이번에 인신공양 1구 추가 확인…1985~90년 발굴 20여구도 미지수

 

신라가 경주 월성에 궁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희생물로 쓴 증거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7년에 경주 월성 서성벽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인신공희(人身供犧) 사례로 인골 2구가 확인한데 이어 이번에 제물로 바쳐진 성인 여성 인골 1구를 추가발굴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로 월성 기초부 공사를 끝내고 성벽을 거대하게 쌓아 올리기 전, 성벽과 문지가 견고하게 축조되길 바라는 인신공희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2017년에 보고된 50대 남녀 인골에 더해 성인 여성 인골과 동물뼈 등을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번에 확인된 여성 인골은 이전과 달리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 팔찌를 착용했고, 키가 약 135cm 전후로 체격이 왜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뼈는 말, 소 등 대형 포유류로 추정되며, 늑골 부위 위주로 선별하여 제물로 바쳐졌다.

 

월성 서성벽 조사 구간(항공 촬영) /문화재청
월성 서성벽 조사 구간(항공 촬영) /문화재청

 

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7년에 월성 서성벽 구간을 정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내에서 최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사람, 동물 등을 제물로 바친 정황을 확인했다. 이후 서성벽의 축조 공정을 세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 월성 서성벽의 인신공희는 국내 유일의 성벽 의례이며, 현재까지 신라가 최초로 축조한 왕성 월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월성 서성벽 추가 조사와 성벽 단면 /문화재청
월성 서성벽 추가 조사와 성벽 단면 /문화재청

 

앞서 1985년과 1990년 시굴·발굴조사에서 인신공희 지점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출처 불명의 인골 20구 이상이 일괄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번에 밝혀진 월성의 축성 작업과 비교한 결과, 이들 인골 또한 성벽 축조 과정과 관련해 묻힌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20구의 인골이 인신공양과 관련된 것인지 여부는 학계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2017년 월성 서성벽 인신공희 /문화재청
2017년 월성 서성벽 인신공희 /문화재청
2021년 추가 조사된 인골 2구 /문화재청
2021년 추가 조사된 인골 2구 /문화재청

 

이번 조사에서 월성의 축조 연대와 축성 방식을 최초로 밝혀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기록에 월성이 파사왕 22(101)에 축조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축성 시기는 문헌 기록보다 250년 후인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성 축조 연대는 출토 유물의 전수 조사와 40여 점에 가까운 가속질량분석기(AMS, Accelerator Mass Spectrometer) 연대 분석에 토대로 이뤄졌다.

월성은 신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성으로 알려졌지만, 그 축조 수준은 토목공학적으로 다양한 축성 기술이 집약되어있다.

먼저 일정 간격으로 나무 말목을 박은 지정(地釘)공법과 목재, 식물류를 층층이 깐 부엽(敷葉)공법 등 기초부 공사를 통해 월성 지형의 연약한 지반을 보강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성벽 몸체를 만드는 체성부 공사에서는 볏짚·점토 덩어리·건물 벽체 등을 다양한 성벽 재료로 사용하여 높고 거대하게 만드는 토목 기술이 확인되었다. 월성 성벽은 너비 약 40m, 높이 10m 이상으로 추정되어, 신라인들의 뛰어난 토목 기술과 당시 왕성의 웅장함을 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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