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⑧…뇌물로 대총통이 된 차오쿤
중국 군벌시대⑧…뇌물로 대총통이 된 차오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8 13: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화제 실시 이후 최악의 부정선거…불복세력에 반발 여지 남겨

 

중화민국의 대총통은 우리나라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신해혁명 직후 민국은 전국적인 선서를 실시할 여건이 되지 못해 대총통은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위안스카이 이후 대총통의 운명은 군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위안스카이 사후에 대총통에 오른 리위안훙(黎元洪)은 북양군벌 돤치루이, 펑궈장에 의해 쫓겨났고, 그 뒤를 이은 펑궈장도 안후이파 돤치루이에 의해 교체되었다.

돤치루이는 1918년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 쉬스창(徐世昌)을 대총통으로 옹립했다. 1920년 안직전쟁에서 돤치루이가 쫓겨난 이후에 쉬스창은 즈리파와 펑톈파 사이를 오가며 총통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1922년 제1차 봉직전쟁에 펑톈파가 패배하고 즈리파가 권력을 잡자 쉬스창의 지위가 흔들거렸다.

 

즈리파의 실력자 우페이푸는 쉬스창을 괴롭혔다. 그는 즈리파를 동원해 대총통 하야 작전을 전개했다. 쉬스창을 끌어내리는 명분은 그를 대총통으로 뽑은 국회가 법적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중화민국의 정통헌법은 신해혁명후 쑨원의 난징정부가 1912년만든 임시약법이고, 그 규정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고 총통을 선출해야 한다. 하지만 위안스카이 사후에 돤치루이 정권은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만든 법률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대총통을 선출했다. 그러므로 쉬스창의 적격성에 하자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우페이푸는 정통 헌법을 다시 회복하자는 의미로 법통중광(法統重光)을 외치며 쉬스창을 공격했다. 즈리파 군인들은 쉬스창을 합법적인 대총통으로 인정할수 없으니,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리곤 국회를 다시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즈리파의 총공세에 직면해 쉬스창은 19226월초 지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총통에 오른지 38개월만이다.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曹錕)이 그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즈리파의 2인자 우페이푸가 보기엔 차오쿤이 대총통에 오를 때가 아니었다. 우페이푸는 보스에게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 리위안훙을 다시 올렸다.

리위안훙은 베이징에서 두 번째로 대총통에 취임했다. 차오쿤은 취임식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차오쿤과 우페이푸 사이에 미묘한 주도권 갈등이 벌어졌다. 펑궈장 밑에서 즈리파의 핵심을 구성했던 그들은 이제 차오쿤을 중심으로 하는 바오딩(保定)파와 우페이푸의 뤼양(洛陽)파로 갈라졌다. 두 파벌은 서로를 견제했지만 군사적으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차오쿤 /위키피디아
차오쿤 /위키피디아

 

리위안훙은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직후, 1922년 쉬스창이 물러난 후 북양군벌과 그 파벌들에 의해 두 차례나 임시대총통에 올랐지만 자신의 기반은 없었다. 이번에도 군벌들이 그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차오쿤이 리위안훙을 흔들었다. 애시당초 차오쿤이 대총통이 되었다면 리위안훙은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오쿤은 수하 군벌들을 동원해 취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리위안훙을 압박했다. 리위안훙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자를 해결해야 했다. 19234월말 즈리파 장군 85명이 밀린 군비를 내놓으라며 대총통부 앞에서 시위를 했다. 국무총리 장사오쩡(張紹曾)이 급한 돈부터 지급하겠다고 군인들을 달랬지만, 군인들은 내각총사퇴를 요구했다. 장사오쩡은 사직서를 내고 텐진으로 가버렸다.

67일 차오쿤은 자신의 직계조직인 공민당을 동원해 국민대회를 열고 총통 퇴진을 주장했다. 곧이어 베이징에서 경찰 파업, 공무원 파업이 일어나고 시위대는 최종적으로 리위안훙의 사퇴를 요구했다. 리위안훙은 이런 모든 행위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고 텐진행 열차에 올라탔다.

차오쿤은 리위안훙이 베이징을 비운 사이에 그를 내쫓고 대총통을 꿰어찰 계획을 꾸몄다. 그런데 대총통 인장이 보이지 않았다. 리위안홍이 중화민국 옥새에 해당하는 총통 인장을 가지고 텐진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차오쿤은 즈리 성장 왕청빈(王承斌)에게 급전을 보냈다. 리위안훙을 태운 열차가 텐진에 도착하자 왕청빈은 경찰을 동원해 열차를 정지시키고 총통에게 인장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처음에 그는 성장의 겁박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성장은 도장을 내놓지 않으면 열차에서 나갈수 없다고 했다. 리위안훙은 하는수 없이 인장을 내주었다. 그러자 왕청빈은 하나를 더 요구했다. 이왕에 도장을 내주었으니, 대총통 자리도 내놓으라고 했다. 중화민국의 대총통은 일개 성장의 불법적, 폭력적 행동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23623일 그는 허울뿐인 대총통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차오쿤은 이제 꺼리낄 게 없었다. 그는 국회가 자신을 총통으로 추대해 의결해주기만 기다렸다. 여론은 차오쿤이 총통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의원들도 차오쿤을 지지하는 것을 꺼려했다.

상하이에 체류하던 쑨원이 베이징 정권의 총통 선거에 방해공작을 벌였다. 쑨원은 국회의원들에게 상하이에 오면 일시에 500 위안을 주고, 게다가 매달 300 위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베이징에 있던 국회의원 200여명이 한꺼번에 상하이로 몰려갔다.

국회의원 총수는 874명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우르르 상하이로 떠나버리자 국회를 열수 없고, 총통 선거도 실시할수 없게 되었다. 즈리파 군벌에 비상이 걸렸다. 어떻게든 국회의원을 베이징으로 불러야 했다. 차오쿤은 쑨원보다 더 많은 돈을 걸었다. 일주일에 100 위안, 대총통선거에 참여하면 일시에 5,000 위안을 주겠다고 했다. 지방에 갔던 의원이 돌아오면 1만 위안을 더 얹어 주겠다고도 했다. 국회의원들이 다시 베이징으로 몰려갔다.

이렇게 해서 사용한 돈이 모두 1,350만 위안에 이르렀다. 이 금액은 베이징 정부의 연간세수의 절반에 해당했다. 돈은 재정에서 나갔다. 즈리 성장 왕청빈은 즈리성에서 긁어 모으다시피해서 조달했고, 모자라는 것은 해외차관과 기업 성금을 통해 채웠다.

우페이푸는 대총통 자리에 미쳐 있는 차오쿤이 못마땅했지만 모른척했다.

 

차오쿤 당선후 발행한 은화 /바이두백과
차오쿤 당선후 발행한 은화 /바이두백과

 

105일 대총통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출석의원은 400여명에 불과했다. 총통선거는 재적의원의 3분의2, 583명이 출석해야 했다. 차오쿤은 파벌을 동원해 의원에게 5,000 위안을 줄 터이니 선거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이렇게 해서 동원한 인원이 555, 30여명이 더 와야 했다. 하지만 더 긁어모을 국회의원이 없었다. 중의원 의장 우징렌(吳景濂)이 출석부에 593명이 출석했다고 허위로 기재함으로써 출석의원수를 채웠다.

차오쿤은 48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선거에 춤마도 하지 않은 쑨원이 33석을 얻었다. 중국에서 공화정을 실시헌 이래 최악의 부정선거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 부정선거를 뇌물 회’() 자를 써서 ‘1차오쿤 회선’(曹錕賄選)이라고 한다. ‘

어찌되었든, 차오쿤은 꿈에도 그리던 대총통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불법 선거는 새로운 불신을 초래했다. 쑨원은 더 이상 호법운동(護法運動)을 펼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쑨원은 베이징 정권이 불법정권이므로 타도대상이며, 대화상대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북벌을 추진했다.

안후이파 군벌인 저장 독군 루융샹(盧永祥)은 부정선거 사건을 계기로 차오쿤을 총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반즈리파 세력을 결집하는데 앞장섰다. 국민당, 펑톈 군벌, 저장성 군벌 사이에 연대가 형성되다. 2차 봉직전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발한다.

 


<참고자료>

維基百科, 1923年中華民國大總統選舉

나무위키, 회선 사건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