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⑨…2차 봉직전쟁, 펑위샹의 반란
중국 군벌시대⑨…2차 봉직전쟁, 펑위샹의 반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0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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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즈리 삼각동맹 형성…쿠데타로 즈리파 정권 붕괴, 장쭤린 부상

 

즈리파는 차오쿤의 대총통 선거에서 보듯 부패하고 독선적이었다. 즈리파 군벌이 권럭을 농단하자 다른 군벌들이 연합하기 시작했다. 즈리파에 의해 권력을 잃은 안후이파, 1차 봉직전젱에서 패배한 동북군벌 장쭤린파, 즈리파를 불법정권으로 규정한 쑨원파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세 파벌이 이심전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는데, 이른바 반쯔리(反直) 삼각동맹이다.

19249월 쑨원의 장남 쑨커(孫科)가 아버지의 밀지를 들고 펑톈(奉天)에 도착했다. 지금의 요령성 선양(瀋陽)이다. 장쭤린은 자신의 장남 장쉐량(張學良), 쑨원의 아들 쑨커, 저장성 독군 루융샹(盧永祥)의 아들 류샤오지(盧小嘉)를 동시에 불러 삼공자 모임을 주선했다. 루융샹은 안후이파의 마지막 남은 군벌이었다. 장쭤린은 아버지 대의 동맹을 아들 대로 이어가라는 의미로 모임을 주선한 것이다.

 

장쭤린(왼쪽)과 우페이푸(오른쪽) /위키피디아
장쭤린(왼쪽)과 우페이푸(오른쪽) /위키피디아

 

외부의 삼각동맹 이외에 즈리파 내부에도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펑위샹(馮玉祥)이었다.

펑위샹은 안후이성 출신으로, 32살이던 1914년에 기독교로 개종해 기독교장군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해 지나치게 편파적이어서 허난성을 지배할 때 수십만명 불교도를 추방하고 불교 재산을 몰수했다는 비난을 샀다.

펑위상은 북양군벌 소속이지만, 북양군벌이 안후이파와 즈리파로 갈라지자 두 파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1차 봉직전쟁 때에 장쭤린과 손잡고 쯔리파에 대항하던 허난성 군벌 자오티(趙倜)를 격파한 공로를 인정받아 허난성 독군에 임명되었다.

펑위상은 즈리파의 실세 우페이푸에게 찬밥 대우를 받았다. 여러 파벌을 기웃거린 것이 실세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것 같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 허난성에서 일시금 80만 위안, 매달 20만 위안의 돈을 상납하라고 요구했다. 펑위샹은 일언지하에 이 요구를 거절했다. 그 이유로 그는 허난성 독군 자리를 빼앗기고, 우페이푸의 부하가 그 자리를 꿰어차게 되었다.

펑위샹은 차오쿤에게 달려가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해서 육군부 검열사 자리를 얻었다. 그 자리는 군대에서 위상은 높았지만 휘하에 휘하 병력도 얼마 되지 않고 실권도 없었다. 펑위샹은 한직으로 쫓겨나 우페이푸에 대한 불만을 터트렸다.

펑위샹의 불만이 장쭤린의 귀에 들어갔다. 장쭤린은 19242월 펑위샹의 재혼 혼례식에 부하를 보내 우페이푸를 꺾는데 힘을 합치자고 넌지시 의중을 물었다. 펑위샹은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장쭤린은 결혼 측하금으로 200만 위안의 거금을 전달했다. 병사의 1년치 봉급이 10 위안이던 시절이었다.

 

장쑤-저장 전쟁 /위키피디아
장쑤-저장 전쟁 /위키피디아

 

2차 봉직전쟁은 저장성과 장쑤성의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장쑤 독군 치셰위안(齊燮元)은 즈리파였는데, 최대 상업도시인 상하이를 차지하기 위해 안후이파의 거점이었던 저장성을 공격했다. 치셰위안의 상하이 공격은 192493일 시작되었다.

장쑤(江蘇)-저장(浙江)의 강절(江浙) 전쟁은 곧바로 확전되었다. 저장성 독군 루융샹은 3각동맹을 체결한 장쭤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장쩌린은 약속대로 출병을 명령했다. 쑨원도 북벌 재개를 선언했다.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 대총통도 안후이·장쑤·푸젠·장시성등 남방 4개 성에 루융샹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즈리파는 정부군, 반즈리파는 반란군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장쑤-저장의 싸움은 즈리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즈리파가 푸젠, 안후이, 후베이의 군대를 동원해 루융샹의 저장군을 압박해 나갔다. 개전 20일째 되던 923일 항저우가 함락되면서 저장성은 두동강이 났다. 1013일 루융상은 설자리를 잃고 하야한 뒤에 일본으로 도주했다. 안후이파 잔당들은 상하이의 외국 조계로 도망쳤지만 조계당국의 경찰이 도피자 모두를 체포해 치셰위안에게 넘겨주었다. 장쑤-저장의 전쟁에서 즈리파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저장성에서 루융상이 패배하는 동안에 장쭤린의 펑톈군이 산하이관(山海關)을 향해 남하했다. 장쭤린의 남하 병력은 10만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차오쿤은 뤄양에 있는 우페이푸에게 베이징을 방어하라고 요청했다. 917일 우페이푸는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차오쿤은 우페이푸를 토역군(討逆軍)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장쭤린의 토벌을 명령했다. 우페이푸는 베이징과 즈리의 병력을 산하이관에 집중하고, 장쑤, 안후이, 푸젠의 즈리파 군대에게 북상을 지시했다.

양측은 산하이관에서 혈전을 벌였다. 펑위샹도 우페이푸로부터 북쪽 구베이커우(古北口)를 방어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펑위샹은 느릿느릿 진군해 장쭤린의 군대와 마주쳤다. 양측은 미리 약속한 밀약에 의해 교전을 하지 않았다.

펑위샹은 쑨웨, 왕청빈을 동지로 끌어들였다. 쑨웨는 베이징 경비 부사령관, 왕청빈(王承斌) 은 즈리군 부사령관이었다.

 

펑위샹 /위키피디아
펑위샹 /위키피디아

 

양측은 계속 병력을 투입했다. 우페이푸는 모든 병력을 산하이관에 집중했다. 베이징은 군사적으로 텅빈 공간이었다.

1019일 저녁, 펑위샹은 심복들을 불러 회군을 선언했다. 명분은 인민이었다. 그는 중국 인민을 위해, 장쭤린과 쑨원과 손잡고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친다고 했다. 상대방 군벌과 손잡고 자신이 속한 군벌을 배반하는 것이 인민을 위한 것인가.

3만명에 이르는 펑위샹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방향을 돌렸다. 베이징 위수사령관 쑨웨, 즈리성장겸 즈리군 부사령관 왕청빈도 쿠데타군에 가담하기로 했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이 총구를 거꾸로 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산하이관에 투입된 즈리군은 장쭤린의 동북군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우페이푸는 쿠데타군이 베이징을 무혈입성하는 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023일 새벽, 쿠데타군은 총통부를 포위했다. 군인들은 민폐금지, 애민, 결사보국 등의 완장을 두르고 베이징의 요지를 장악했다. 전투는 없었다. 관저에서 태평스럽게 자고 있던 차오쿤은 반란 소식을 듣고 잠옷 바람으로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망쳤다.

베이징을 장악한 펑위샹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國民軍)이라고 명명했다. 펑위상이 한때 쑨원의 동맹회에도 가입한 전력이 있는데다, 쑨원과 동맹관계에 있으므로 국민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 현대사에서 펑위샹의 쿠데타를 베이징 정변’(Beijing Coup)이라 한다.

 

1924년 북경정변 이후 장쭤린과 펑위샹 등 /위키피디아
1924년 북경정변 이후 장쭤린과 펑위샹 등 /위키피디아

 

1024일 안후이파의 영수 돤치루이가 오랜 거주지였던 텐진을 벗어나 베이징에 도착했다. 펑위샹은 돤치루이를 통해 내전중지와 평화를 요구하는 전문을 전국에 발송했다. 대총통 차오쿤에 대해선 불법 뇌물선거로 대총통의 지위를 도둑질했으므로, 국가와 국민에 해를 끼쳤다는 죄목을 씌워 직위와 권한을 박탈했다.

차오쿤도 자신의 전임인 리위안훙이 그러했듯이 총통 인장을 소지한채 도주했다. 이번에도 왕청빈이 악역을 맡았다. 그는 차오쿤의 지시를 받아 리위안훙에게서 인장을 빼앗았던 일을 차오쿤에게 되풀이했다. 차오쿤은 도장을 내주지 않으려 했다. 왕청빈은 가족과 일가친척의 목숨을 위협하며 도장을 내놓으라고 했다. 차오쿤은 하는수 없이 우페이푸를 파면한다는 내용의 서류에 도장을 찍고, 그 인장을 내주고 말았다.

베이징이 함락되자 산하이관의 즈리군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우페이푸는 일부 군대를 빼서 베이징으로 회군했지만 베이징 근교에서 펑위샹의 군대에 괴멸당했다. 112일 우페이푸는 2,000여명의 병력을 수습한채 텐진 다구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바다로 도망쳤다. 영국군함이 우페이푸의 패잔병을 보호했다. 그들은 일단 뤄양으로 들어가 훗날을 기약했다.

이로써 차오쿤, 우페이푸의 즈리파는 장쭤린-펑위샹의 동맹세력에 의해 붕괴되었다. 1차 봉직전쟁에서 참패했던 장쭤린은 2년만에 즈리파를 패배시키고 권좌를 차지했다.

즈리파가 베이징 정권을 호령하던 시대는 43개월만에 끝났다. 이렇게 해서 위안스카이가 집권한 1912년부터 1924년까지 12년간 중국을 좌지우지던 북양군벌의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북양계열의 돤치루이가 얼굴마담으로 재등장했지만 실권은 마적 출신의 장쭤린에게 넘어갔다.

 


<참고자료>

Wikipedia, Second ZhiliFengtian War

Wikipedia, Beijing Coup

나무위키, 2차 직봉전쟁

나무위키, 북경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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