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⑩…궈쑹링, 장쭤린에 반역하다
중국 군벌시대⑩…궈쑹링, 장쭤린에 반역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11 12: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차 봉직전쟁 이후 펑톈파 독주…장쭤린의 친일 행각에 반감 확산

 

1924년말 2차 봉직전쟁에서 즈리파가 패퇴하고, 중국엔 장쭤린(張作霖), 펑위샹(馮玉祥), 돤치루이(段祺瑞)3두 체제가 형성되었다. 돤치루이는 국회의 동의를 얻지 못해 총통이 될수 없었다. 그는 집정(執政)이란 애매한 타이틀로 베이징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초기에는 장쭤린의 펑톈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펑톈파는 돤치루이를 압박해 산둥, 안후이, 장쑤성의 독판을 차지하고 양쯔강 하류로 세력권을 확대했다. 펑위샹은 차하르, 쑤이위안, 깐수 등 서북 변경지대로 밀려났다. 인구밀도가 높고 농업 소출이 많은 지역은 장쭤린의 영토가 되었다. 펑위샹은 즈리파 제거에 장쭤린과 손을 잡았지만 논공행상과 영토배분에서 소외되어 펑톈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장쭤린의 무한 욕심을 좌절시킨 첫 방해자가 한때 즈리파였던 저장성의 쑨촨팡(孫傳芳)이었다. 그는 장쑤의 양위팅(楊宇霆), 안후이의 장덩쉬안(姜登選) 등 펑텐파 독판들의 전횡이 심각해지고, 강남에선 장쭤린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 갔다.

192510월 펑톈파의 독주와 오만에 염증을 느끼던 저장, 안후이, 푸젠, 장쑤, 장시 등 5개 성의 즈리파 군벌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쑨촨팡은 5개 성의 군벌로 반펑톈(反奉) 연합을 구축하고 5성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5성 연합군은 장쭤린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펑톈파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쑨촨팡은 1016일 상하이에 입성한데 이어 1021일에 난징을 점령했다. 거병한지 열흘만이다. 장시. 안후이, 장쑤성이 돌아서면서 쑨촨팡은 남방 3개 성을 장악하게 되었다.

 

펑텐파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19251121일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텐진 북동쪽에 주둔하던 궈쑹링(郭松齡) 부사령관이 주군이던 장쭤린 타도를 외치면서 총구를 돌렸다. 궈쑹링이 지휘하는 병력은 7~8만명으로 펑톈군의 주력이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수도 펑톈(奉天)을 향해 진격했다.

궈쑹링 /위키피디아
궈쑹링 /위키피디아

궈쑹링은 장쭤린의 장자 장쉐량(張學良)과 막역한 사이였고, 펭톈군벌의 오호장군의 한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핵심인물이었다. 그가 반봉(反奉)사건의 주인공이 된데는 크게 두가지 분석이 나온다. 첫째는 인사 불만이고, 둘째는 민족적 자각이라는 해석이다.

2차 봉직전쟁 후 논공행상에서 궈쑹린은 안후이 독군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양위팅이 끼어들어 장쑤 독군이 되고 장덩쉬안이 안후이 독군이 되었다. 안후이로 부임할 준비까지 마친 궈쑹리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뜻하지 않게 경유주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사령관은 장쉐량이었으나, 부사령관이 실질적 지휘관이었다. 그 자리는 베이징과 톈진을 경비하는 책임자였지만 지방 성주와 같은 권세를 누리는 위치는 아니었다.

 

또다른 해석은 궈쑹링이 장쭤린의 친일 행각에 분노해 거병했다는 시각이다. 궈쑹링은 신해혁명 당시 신군에 가담 혁명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된 이력이 있다. 그후 군부내 지인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베이징 육군대학에서 수하했다. 그후 장쭤린의 군대에 들어가 승승장구했다. 군생활에서도 끽연 음주 도박을 전혀 하지 않았고 여자를 밝히지도 않았으며, 독서와 신문 열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절친인 장쉐량의 부친이자 군벌 수장인 장쭤린에 등을 돌린 것은 192510월이다. 그는 일본 미야기현에서 실시하는 일본 육군의 훈련을 관람하기 위해 중국 여러 군벌이 파견한 장교들과 함께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제국호텔에 투숙하고 있는데, 일본 참모본부에서 파견한 사람이 당신이 장쭤린 장군의 밀약체결 임무 때문에 대표로 온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수상쩍게 생각해 일본측이 언급한 밀약의 존재에 대해 조사해 보았고, 그 결과 장쭤린이 일본과 21개조 밀약을 체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장쭤린은 이를 조인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했는데, 일본측이 궈쑹링을 대표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궈쑹링은 보스의 매국행위에 분노하던 차에 함께 참관단으로 와 제국호텔에 묵던 펑위샹의 부하 한푸쥐(韓復榘)에게 장쭤린이 개인적 이득을 위해 인민을 져버리고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에 한푸쥐는 펑위샹과의 비밀동맹을 제의했다. 한푸쥐는 귀국후 상관인 펑위샹에게 귀쑹링에게 동맹을 제의한 사실을 보고했고, 이렇게 해서 두 군벌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궈쑹링은 이어 펑톈파로 즈리 군무독판을 맡고 있던 리장린(李景林)도 끌어들여 펑위샹과 함께 반봉 3각동맹을 체결했다.

 

궈쑹링은 1121일 군사회의를 열어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궈쑹링의 거병에 즈리 독군 리징린도 즉시 장쭤린의 타도를 외치고 정권을 인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반란군은 군대 이름을 동북국민군이라고 했다. 궈쑹링은 한때 쑨원을 흠모했기 때문에 국민군이란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펑위샹의 군대도 국민군이고 불렀다. 후세인들이 궈쑹링의 반란 사건을 국봉전쟁(國奉戰爭)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반란군은 빠른 속도로 만주군의 수도 펑톈으로 진격했다. 장쭤린은 125일 반란군의 요구대로 하야 의사를 밝히고 뤼순(旅順)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에 보호를 요청했다. 그는 가솔과 함께 재산을 바라바리 실어 다롄(大連)으로 보냈고, 여차하면 자신도 그리로 갈 생각을 했었다. 그가 친일 군벌이란 욕을 얻어 먹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게인적 위기가 다가오자 이 친일파는 일본에 손을 내민 것이다.

 

일본은 중국 군벌 싸움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장쭤린의 위기에는 달랐다. 일본 총영사는 1,000명의 일본군을 펑톈에 파견해 성문과 관공서, 교차로에 배치했다. 궈쑹링이 장쭤린을 체포하기 위해 펑톈에 진입하려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관동군은 또 반란군이 남만주철도(만철) 12km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했고, 궈쑹링의 군대가 만철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반면에 장쭤린의 군대는 만철을 활용했다. 이어 일본은 조선 주둔군 2개 사단을 만주에 배치해 총 4만명의 군대를 펑톈 인근에 깔아 놓았다.

1221일 반군은 펑텐 외곽도시 신민(新民)을 점령했다. 궈쑹링의 거사는 여기까지였다.

장쭤린의 본군은 항공기를 동원해 반란군의 후방을 습격했다. 일본이 운영하는 만철을 이용해 장쭤린의 군대가 속속 펑톈에 집결했다. 펑톈군은 귀쑹링 군대의 병참을 습격해 끊어 버렸다. 함께 거병하기로 했던 리장린은 어머니의 설득에 못이기는척 하며 봉기 가담을 포기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아버지의 위기에 친구를 버렸다. 장쉐량은 총반격에 나섰고, 궈쑹린의 병사들은 속속 탈영했다.

 

1224일 새벽 1, 궈쑹링은 패배를 인정하고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그는 직속 상관이자 친구인 장쉐량에게 전문을 보내 마지막 인사를 했다. 궈쑹링은 부인 한수슈(韓淑秀)와 호위병 200명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펑톈군은 궈쑹링 부부를 추격했다. 호위병들이 저항화는 사이에 부부는 산 속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토굴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가까운 농가에 감금되었다. 장쭤린은 궈쑹링 부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보고받고,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1225일 오전 10, 궈쑹링과 부인 한수슈는 총살당했다. 궈쑹링은 42, 한수슈는 34세였다. 중국을 뒤흔들었던 궈쑹링의 반란은 14일만에 끝났다.

총살 직전에 장쭤린의 부하가 궈쑹링에게 반란의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수의 군벌들이 군사를 몰아 싸우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동북 삼성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전쟁을 하지 아니하고 건설에 힘쓴다면 충분히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이것(전쟁)에 반대했지만 상장군(장쭤린)은 나에게 오히려 욕을 해댔다.”

 


<참고자료>

郭松齡'反奉事件', 송한용 호남사학회 2002

Wikipedia, Anti-Fengtian War

나무위키, 반봉사건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