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시대⑪…적과 동지
중국 군벌시대⑪…적과 동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1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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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우페이푸와 다시 손잡다…장제스의 북벌로 군벌시대 종식

 

두 차례의 봉직전쟁은 즈리파와 펑톈파의 권력다툼이었다. 1차 전쟁에선 즈리파가, 2차에선 펑톈파가 승리했다.

1924112일 즈리파의 실력자 우페이푸(吳佩孚)는 북쪽에서 장쭤린(張作霖)의 군대, 남쪽에서 배신자 펑위샹(馮玉祥)에 포위되어 궤멸의 상황에 처했다. 그는 일단 톈진의 외항 다구항에서 화물선을 잡아 타고 바다로 도망쳤다. 우페이푸는 산둥성을 거쳐 본거지인 허난성으로 돌아가 재기를 모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즈리파였던 산둥성 독군 정스치(鄭士琦)가 장쭤린에 붙어 그의 길을 막아 버렸다. 살기 위해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군벌시대에 그들은 배신을 밥 먹듯 했다. 우페이푸는 방향을 바꿔 난징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즈리파였던 장쑤 독군 치셰위안(齊燮元)이 그의 상륙을 거부하고 오히려 감시했다. 우페이푸는 하는수 없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생 끝에 허난성 수도 정저우(鄭州)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장쭤린의 부하들이 밀려온데다 배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허베이의 한커우(漢口)로 도주했다.

허베이는 즈리파이자 우페이푸의 심복 샤오야오난(蕭耀南)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페이푸는 그곳에서 즈리파를 규합하려 했다. 그랬더니 샤오야오난이 막았다. 자신의 영토에 들어와 상전노릇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우페이푸는 웨저우(岳州)로 옮겨 막연하게 세상을 기다렸다.

거의 몰락할 위기에 처해 있던 우페이푸에게 재기의 기회가 왔다. 192510월 저장 독판 쑨촨팡(孫傳芳) 5개성 군벌들이 연합군을 편성해 장쭤린 토벌에 나선 것이다. 쑨촨팡 등은 우페이푸를 여전히 상관으로 모시겠다며, 연합군벌의 좌장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페이푸는 옛 즈리파의 도움으로 장쭤린과 평위샹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군벌들의 열차 장악 /위키피디아
군벌들의 열차 장악 /위키피디아

 

1925, 북방에서는 즈리파를 몰아낼 때 손을 잡았던 장쭤린과 펑위샹 사이에 틈이 발생했다. 펑위샹은 장쭤린의 부하 궈쑹링(郭松齡), 리징린(李景林)과 함께 반펑톈(反奉) 삼각동맹을 맺었다.

반봉 전쟁은 192511월 궈쑹링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궈쑹린은 7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펑톈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리징린은 배신을 때리고 장쭤린의 품으로 돌아갔다.

리징린은 총구를 돌려 펑위샹 군대에 싸움을 걸었다. 펑위샹은 즈리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리징린의 군대는 산하이관(山海關)에 주둔했다. 베이징과 톈진 일대에서 양측 군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펑위샹은 리징린을 격파하고 즈리성을 다시 찾았다. 리징린은 패퇴하고 칭다오로 도주해 펑텐파인 산둥성 독판 장쭝창(張宗昌)에게 몸을 의지했다. 하지만 궈쑹링은 장쭤린의 군대에 패해 1224일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이제 장쭤린과 펑위샹의 한판 승부만 남게 되었다.

 

군복을 입고 있는 장쭤린과 두 아들 /위키피디아
군복을 입고 있는 장쭤린과 두 아들 /위키피디아

 

2년전에 우페이푸를 쫓아낼 때 한 패가 되었던 장쭤린과 펑위샹은 서로 적이 되었다. 장과 펑은 어제의 적이었던 우페이푸에세 서로 손을 내밀었다. 우페이푸로선 꽃놀이패다. 장쭤린의 동북군과 펑위샹의 서북군은 비슷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우페이푸의 즈리군이 어느 쪽에 붙는지 여부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우페이푸에겐 장쭤린이든, 펑위샹이든 둘다 적이다. 둘 다 자신을 고난의 행군으로 몰아넣었던 자들이었다. 누구 편을 들 것인가. 우페이푸는 부하였다가 등을 돌린 펑위샹이 더 미웠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장쭤린이었다.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안직전쟁(1920)에서 안후이파를 몰아낼땐 동지였다가 1차 봉직전쟁(1922)2차 봉직전쟁(1924)에선 적으로 돌변했다. 2년후 두 군벌은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19261월 장쭤린과 우페이푸는 각자의 대표를 다롄(大連)에 파견,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은 펑위샹을 토벌한 후 중국을 공동으로 지배하자는 것이다.

214일 후베이 독군 샤오야오난이 급사했다. 샤오야오난은 우페이푸의 심복으로 그가 어려울 때 등을 돌린 인물이었다. 항간에 샤오야오난이 우페이푸의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우페이푸는 그 자리에 또다른 심복을 추대하고 후베이성을 장악했다.

 

펑위샹은 소련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코민테른 책임자 미하일 보로딘을 접촉해 소련애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군대를 훈련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소련은 당시 쑨원과 협력하고 있었는데, 또다른 군벌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펑위샹은 소련제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고 소련의 군사고문단 파견도 받았다.

하지만 펑위샹은 소련의 지원만으로 좁혀오는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북쪽의 장줘린, 남쪽의 우페이푸. 산둥성의 장쭝창이 밀고 들어오면 펑위샹의 군대는 이기기 힘들어진다.

펑위샹은 전쟁보다는 평화 노선을 택했다. 그는 스스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 장쭤린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그리곤 소련으로 출국했다.

 

펑텐파의 장갑차 /위키피디아
펑텐파의 장갑차 /위키피디아

 

펑위샹의 화해 제스추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쟁 기계는 작동하고 있었다. 1926년 장쭤린은 펑톈군의 출동을 명령했다. 산둥성에선 장쭝창이 협공하고, 허난성에선 우페이푸가 북상했다.

펑위샹이 부재한 가운데 그의 부하들은 전투에 임했다. 장쭤린-우페이푸의 연합군은 서서히 승기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돤치루이 정권은 군벌 전쟁에서 애매한 중립을 지켰다. 안후이파인 돤치루이는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에 붙을 작전이었다.

군벌들의 안중엔 국민이 보이지도 않았다. 펑위샹의 군대는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장쭤린의 편을 섰다. 312일 일본군 구축함이 다구항에 진입을 시도하려는 순간에 펑위샹 군대의 반격을 받았다. 318일 베이징 시민과 학생 5,000명이 외국의 간섭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돤치루이 정권은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47명이 죽고 132명이 부상을 당했다.

돤치루이 정권은 이 사태를 책임지고 스스로 해산했다. 무정부 상태 속에서 군벌들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펑위샹과 장쭤린 사이에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던 돤치루이는 이번엔 안후이, 펀텐, 즈리파가 참여하는 새로운 연합정권을 세우자고 제의했다. 소멸하는 안후이파 수장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우페이푸는 그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돤치루이는 전계은퇴를 선언했다.

 

펑위샹의 잔당들은 그동안 연금상태로 가둬 놓았던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曹錕)을 석방해 우페이푸에 돌려 보냈다. 19264월 우페이푸는 베이징에 입성했다. 즈리파와 펑텐파의 연합정권이 다시 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즈리파의 이번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전쟁은 자신들의 권력욕에서 출발한 것이지, 국민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즈리파든, 안후이파든, 펭텐파든 군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었다. 위안스카이 이후 역대 북양군벌은 매국적 성격을 띠었다. 국민들은 이들 매판 군벌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혁명 세력을 원했다. 그 혁명 세력은 쑨원이 죽은후 국민당에 부상하는 장제스(蔣介石)였다. 1912년 위안스카이 집권이후 10년 이상 지속되었던 중국의 군벌시대는 장제스의 북벌에 의해 종식된다.

 


<참고자료>

Wikipedia, Warlord Era

Wikipedia, Anti-Fengt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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