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순국자 추모하는 장충단비
을미사변 순국자 추모하는 장충단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9.12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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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엔 이토 히로부미 절도…광복 이후 비석 찾아내 원래 자리로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은 조선시대에 군대가 주둔하던 '남소영‘(南小營)이란 곳이었다.

19009월에 고종은 이 곳에 을미 사변때 순사한 충신들을 기리는 장충단(奬忠壇)을 꾸며 배향했다. 사당도 별도로 지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 민비가 살해된 후 5년이 지나 친러시아 정책을 표방하던 때였다.

처음엔 을미사변에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갑오년에 순직한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했다. 이후 다음해에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해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로 배향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이 행사는 1908년까지 매년 봄과 가을에 열렸다.

 

장충단비 /박차영
장충단비 /박차영

 

하지만 일제가 이 나라를 도적질한 이후 장충단은 일본인을 위한 자리로 바뀌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을 때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이 곳에서 열렸다. 1

910년 일제가 이 나라를 들어먹은 이후 그들은 장충단을 폐사시키고, 제단 등 시설들을 훼손했다. 1920년대부터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고, 벚나무를 심고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 군인 동상을 세워 일본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박문사(博文寺)도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시는 일본식 시설을 모두 철거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이 파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는 남아 있었다. 장충단비는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는데, 196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奬忠壇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閔泳煥)이 쓴 것이다.

장충단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도 매년 108일 을미사변 순국자를 배향하는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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