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의 북벌②…우페이푸를 제압하다
장제스의 북벌②…우페이푸를 제압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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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과 후베이에서 북벌 시작…펑위샹도 귀국후 국민당에 가세

 

장제스가 광둥정부의 군권을 장악할 무렵, 이웃 광시성이 또다른 혁명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리쭝런(李宗仁)이 부패한 군벌 루룽팅(陸榮廷)을 타도하고 19254월에 성도 난닝(南寧)을 점령, 광시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리쭝런은 일찍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해 호법전쟁에 참여하는 등 쑨원 추종파였다.

19261월 광둥과 광시군은 서로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광둥성만 장악했던 국민혁명군은 광시성을 합쳐 2개성으로 세력을 확대한 것이다.

곧이어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국민당내 좌파를 제어하고 북벌론을 관철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주석에 이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본격적으로 북벌을 단행하기 직전에 우페이푸의 영토였던 후난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후난은 자오헝티(趙恒惕)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즈리파 우페이푸와 손잡고 있었다. 19263월 사단장이던 탕성즈(唐生智)가 반란을 일으켜 자오헝티를 쫓아내고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호소했다. 후난성에서 즈리파 군벌과 국민당 정부의 대리전이 벌어진 것이다.

후베이성의 우페이푸 군대가 탕성즈를 공격했다. 탕성즈는 성도 창사(長沙)까지 빼앗기며 밀려났다. 국민정부는 탕성즈를 돕기로 했다. 이리하여. 장제스의 북벌은 군벌 우페이푸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장제스 북벌 직전의 군벌 세력도 /위키피디아
장제스 북벌 직전의 군벌 세력도 /위키피디아

 

장제스 북벌을 시작할 무렵, 중국에는 크게 6대 군벌이 할거하고 있었다. 동북3성과 즈리성 일부, 산둥성을 차지하고 있는 장쭤린, 후난, 후베이, 허난성을 장악한 우페이푸, 저장, 장쑤, 안후이, 장시, 푸젠의 동남부 5성을 차지한 쑨촨팡, 산시성을 차지한 옌시산, 내몽골과 즈리성을 차지한 펑위샹, 그리고 남방의 광둥·광시 2개성을 가진 국민당이었다.

국민혁명군은 장쭤린, 우페이푸, 쑨촨팡에 비해 영토 규모나, 병력수, 무기 수준에서 약체였다. 그러면 장제스는 무엇을 믿고 북벌에 나섰을까.

첫째는 혁명의 대의다. 전쟁의 성패는 군사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명분이 중요하다. 국민당의 혁명론은 민족주의에 불타는 국민정서에 부합했다.

둘째는 북방 군벌의 분열이다. 국민군의 북벌이 시작될 당시에 만주 군벌에는 궈쑹링의 반란이 있었고 장쭤린, 우페이푸, 쑨촨팡이 합세해 펑위샹을 공격하고 있었다. 특히 광둥성과 이웃하고 있는 우페이푸와 쑨촹팡의 군대는 북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방의 국민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후베이성 우창을 공격하는 국민혁명군 /위키피디아
후베이성 우창을 공격하는 국민혁명군 /위키피디아

 

국민당의 첫 타깃은 우페이푸와 쑨촨팡 둘 중 하나였다. 우페이푸가 장악하고 있는 우한3( 한양, 한커우, 우창)90만의 인구에 공업과 상업이 발달해 있고, 주요한 무기공장이 있었다. 신해혁명을 점화시킨 우창봉기가 일어난 정치적 상징도 있었다. 코민테른의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도 후베이를 우선 공격목표로 지목했다. 이럴 때 후난의 탕성즈가 국민당에 합류할 것을 선언하며 지원을 호소한 것이다.

71일 장제스는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고, 74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북벌을 정식 결의했다. 79일 황푸사관학교 연병장에 5만명의 군인과 시민이 모인 가운데 장제스는 장중하게 출정식을 가졌다. 첫 상대는 우페이푸였다.

북벌군은 탕성즈를 선봉으로 삼아 후난성으로 진입했다. 이틀후인 711일에 북벌군은 후난성 성도 창사를 함락했다. 북벌군은 우한을 향해 진격했다.

 

우페이푸는 즈리성에 주력부대를 펼쳐놓고 펑위샹 잔당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펑위샹은 이미 공직에서 물러나 소련에 가 있었고, 그의 부하들이 베이징을 방어하고 있었다. 우페이푸는 본거지 후베이가 위협받고 있다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지만, 그는 북방에 집중하느라, 남쪽으로 군대를 돌리지 못했다. 장쭤린에게 즈리성을 내줄수 없었다. 수도권을 장악해야 권력을 쥘수 있다. 먼저 즈리성을 확보한 후 본거지 후베이를 방어해도 늦지 않다고 우페이푸는 판단했다. 광둥·광시의 군대를 얕잡아 본 것이다.

우페이푸의 이런 오판은 후베이 방어를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북벌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펑위샹 부하들도 국민군이란 명칭을 썼다. 연대하지는 않았지만, 남방의 국민혁명군과 서북의 국민군이 우페이푸 군벌을 남북으로 갈리친 것이다.

우페이푸의 주력군은 즈리에서 518일부터 814일까지 3개월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우페이푸가 북방에서 승리한 후 돌아보니, 장제스의 북벌군은 우한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장제스가 북벌을 시작한지 두달 동안 우페이푸는 등을 내준 것이다.

 

1926년 10월, 한커우 영국 조계에 진입하는 국민혁명군 /위키피디아
1926년 10월, 한커우 영국 조계에 진입하는 국민혁명군 /위키피디아

 

8월말 우한 남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팅스차오(汀泗桥)를 둘러싸고 북벌군과 우페이푸군은 뻿고 뺏기는 싸움을 벌인 결과, 최종 승리는 북벌군에 돌아갔다. 이어 우한3진을 놓고 양측 군대는 격전을 벌였다. 한양에서 우페이푸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결정적인 승부는 우페이푸군의 1개 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북벌군에 투항한 것이다. 즈리군은 급속하게 붕괴되었다. 우창에서도 우페이푸 수하 1개 사단이 투항했다. 신해혁명 15주년이 되는 1010, 북벌군은 우한3진을 손에 넣었다.

이후 후베이성의 우페이푸군은 괴멸하듯 붕괴되었다. 북벌군은 후난(湖南)과 후베이(湖北)의 양호(兩湖)를 손에 넣게 되었다.

북벌군이 양호의 우페이군을 무찔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에 있던 군소 군벌들이 북벌군에 투항했다. 구이저우(貴州)의 위안쭈밍(袁組銘), 쓰촨(四川)의 양썬(楊森), 충칭(重慶)의 류샹(劉湘), 쓰촨 남부의 류원후이(劉文輝) 등이 속속 국민군에 편제되었다. 윈난성에선 쿠데타가 발생해 룽원(龍雲)이 탕지야오(唐繼堯)를 쫓아내고 정권을 잡고 국민군에 투항했다. 북벌군은 중국 남서부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우페이푸는 후난과 후베이를 잃었지만 베이징-톈진이 있는 즈리성을 장악했다. 우페이푸에 쫓겨난 펑위샹 휘하의 국민군은 괴멸되다시피한 채로 내몽골로 도주했다.

펑위샹은 자신의 부대가 패퇴할 시기에 소련에 가 있었다. 19261월 공직에서 사퇴한 그는 소련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레온 트로츠키, 레닌의 부인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 등과 만나 혁명 사상을 논의하고 친분을 두텁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이 우페이푸에겍 패해 서북 건조지대로 패주하던 8월말, 펑위샹은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915일 내몽골에 도착해 부하들과 조우했다.

 

그에게 적의 적은 우군이었다. 펑위샹은 우페이푸의 적 북벌군과 손잡았다. 그는 신해혁명에 동참했고, 부패하고 탐욕스런 군벌을 타도하려 한 점에서 국민당의 혁명론에 동조하기 쉬웠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으로 선포하고, 전군을 국민당에 가입시켰다. 이를 우위안(五原)선언이라 한다. 남방의 장제스와 서북방의 펑위샹이 우군이 되었다. 펑위샹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혁명군 연군(聯軍)으로 불렀다.

펑위샹이 군대는 샨시(陝西)성 시안(西安)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양후청(楊虎城), 리후천(李虎臣)이 이끄는 2개 사단이 우페이푸군의 포위망에 갇혀 8개월째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시안을 되찾고 샨시 전역을 차지했다. 이어 닝샤(寧夏), 칭하이(靑海), 간쑤(甘肅)도 평정했다. 서북은 펑위샹의 세력권으로 돌아갔다.

 


<참고자료>

Wikipedia, Northern Expedition

나무위키, 국민당의 1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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