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탈레반이 소중화 사상 깊이 새긴 조종암
조선의 탈레반이 소중화 사상 깊이 새긴 조종암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9.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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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명나라에 충성 맹세…명나라 황제 모시는 대통묘도

 

조선시대 선비들이 명당이라고 꼽은 곳의 공통점은 경치가 좋은 곳이다.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에 있는 조종암(朝宗岩)도 풍경이 좋다.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활짝 트인 개활지에 대보천이 흐른다.

이 좋은 곳에 조선의 탈레반들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돌에 새겼다. 사상적, 이념적 원리주의자는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탈레반과 다를 게 없다.

병자호란(1636)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조선의 상국(上國)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다. 그시대의 지배계급은 누구를 윗전으로 모시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나라는 만주족 오랑캐의 나라이고, 명나라는 한족의 나라이므로 한족 국가가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는 피지배자가 갖는 인종주의에 불과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만주족에 무릎 꿇기보다는 한족을 그리워했다.

 

조종암 일대 /박차영
조종암 일대 /박차영

 

병자호란은 한마디로 조선의 상전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전쟁이었다. 명나라를 모실래, 청나라를 모실래 하는 게 명분이었다. 그로부터 50년후 임금이 세 번 바꾸어 숙종 10(1684)에도 조선의 탈레반은 명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을 되새겼다.

가평군수를 지낸 이제두(李齊杜)와 명나라 유신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이 이곳 조정암 큰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조종(朝宗)이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인데, 이 곳은 조선시대 후기에 명분론을 앞세운 숭명배청론자들에 의해 정신적 지주로 삼는 곳이 되었다.

글씨는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이 쓴 思無邪’(사무사: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는 친필을 허격이 가져와 맨 왼쪽 높은 바위에 새겼다.

 

조종암의 글자(萬折必東 再造蕃邦) /박차영
조종암의 글자(萬折必東 再造蕃邦) /박차영

 

그 아래에는 선조(宣祖)의 친필 황하가 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녘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주었네하는 萬折必東 再造蕃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이 새겨져 있다. 조선 임금이 명나라 황제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었으니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의미다.

또 선조의 친손 낭선군 이우(李俁)명나라 황제를 뵙는 바위라는 朝宗巖’(조종암)을 새겼다.

 

조종암의 글자(日暮道遠 至痛在心) /박차영
조종암의 글자(日暮道遠 至痛在心) /박차영

 

조선후기 주류 사상가 송시열(宋時烈)이 쓴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라는 글귀도 있다. 긴 세월의 풍상을 겪고 바위 면이 검은 이끼로 덮이긴 했지만 워낙 깊고 뚜렷이 각을 떴기 때문에 맨눈으로도 판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조종암 기실비 /박차영
조종암 기실비 /박차영

 

중앙에 세워진 비석은 순조 4(1804) 조종암을 세운 이유와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조종암기실비다. 오른쪽 바위에는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증교가 쓴 견심정(見心亭)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은 숭명반청, 소중화(小中華)의 사고에 빠졌다. 조종암은 만주족에 복속했지만 마음은 명나라를 숭배하는 숭명배청(崇明排淸) 보여주는 사례다.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조종암에 새겨진 글자 /박차영
조종암에 새겨진 글자 /박차영

 

조종암에서 300m 가량 더 가면 대통묘(大統廟)가 있다. 입구의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사전에 허락을 받지 못하면 관람할수 없다고 한다.

1831년에는 명나라 후손인 왕덕일·정석일·풍재수·황재겸 등이 지방 유림과 함께 이 곳에 제단을 만들고 대통행묘(大統行廟)’구의행사(九義行祠)’라 이름 지었다. 대통묘에는 명나라 태조(주원장)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간 봉림대군이 1645년 귀국할 때 조선으로 망명한 명나라의 9의사(九義士)를 제사 지내고 있다. 가평군 자료에 따르면, 9의사의 후손인 제남 왕씨가 조선시대 이래 지금까지 이 곳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묘로 올라가는 길. /사진=가평군 블로그
대통묘로 올라가는 길. /사진=가평군 블로그

 

일제강점기인 1934년 이후 절사(絶祀)되었다가 1958년 가평 지방 유지의 발기로 옛 터에 다시 제단을 보수하고 음력 14일 대통묘(명나라 태조·신종·의종)9의사 제향을 지내고 있다.

경내의 건물은 대통묘·신문(神門조종재(朝宗齋) 등이 있다. 대통묘의 중앙에는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동편에는 김상헌·김응하·홍익한·임경업·이완·윤집·오달제·이항로·유인석 등 조선문무 9현을, 서편에는 왕미승·풍삼사·황공·정선갑·양복길·배삼생·왕문상·왕이문·유계산 등 명나라 9의사를 종향하고 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19일에 봉행하고 있다.

 
대통묘 내 조종재. 일종의 재실이다. /사진=가평군 블로그
대통묘 내 조종재. 일종의 재실이다. /사진=가평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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