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금이 가보고 싶어한 삼척 죽서루
조선 임금이 가보고 싶어한 삼척 죽서루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9.16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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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진 관동팔경 제일경

 

조선 정조 임금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듣고 김홍도에게 지시해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다. 정조는 그 그림을 보고 칠언시를 지었다. 김홍도는 어명을 받고 관동지방의 절경을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삼척의 죽서루 그림을 보고 칠언시를 썼다.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다듬고 절벽 쪼아 세운 누각 하나/ 누각 옆은 바다이고 바다에는 갈매기 노네/ 죽서루가 있는 고을의 태수는 어느집 아들인가/ 미녀들 가득 싣고 밤 세워 뱃놀이 하는구나

정조는 자신이 적접 죽서루에 가서 뱃놀이 하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시로 지어 대신한 것이다. 임금은 죽서루에 미녀들과 뱃놀이하는 삼척부사를 부러워 했다.

 

죽서루 측면 절벽과 그 밑에 흐르는 오십천 /문화재청
죽서루 측면 절벽과 그 밑에 흐르는 오십천 /문화재청

 

조선시대 시인이며 묵객이 동해안을 지나며 반드시 들러 시 한수, 글 한 줄 쓴 곳이 강원도 삼척 죽서루(竹西樓). 죽서루는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지 않고 강을 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관동팔경의 제1경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관동별곡에서 죽서루를 이렇게 노래했다.

眞珠館(진쥬관) 竹西樓(듁셔루) 五十川(오십쳔) 나린 믈이 太白山(태백산) 그림재를 東海(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漢江(한강)木覓(목멱)의 다히고져. 王程(왕뎡)有限(유한)하고 風景(풍경)이 못 슬믜니, 幽懷(유회)도 하도 할샤, 客愁(객수)도 둘 듸 업다. ()사랄 띄워 내여 斗牛(두우)()하살가, 仙人(션인)을 차자려 丹穴(단혈)의 머므살가."

삼척 죽서루 아래 오십천의 흘러 내리는 물이 태백산의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임금 계신 한강으로 돌려 서울의 남산에 대고 싶구나. 관리의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많고, 나그네 시름도 달랠 길 없구나. 신선의 뗏목을 띄워 내어 북두성과 견우성으로 향할까? 사선을 찾으러 단혈에 머무를까?”

 

죽서루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 /문화재청
죽서루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 /문화재청

 

정철이 죽서루의 풍경을 보고 임금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정도다. 죽서루의 누각은 보물 213호로 지정되었고, 죽서루와 인근 오십천 및 절벽은 명승 28호다.

 

죽서루가 절경인 것은 태백에서 발원한 오십천(五十川)이 삼척시를 굽이쳐 흐르면서 협곡과 절벽을 이루는 부위에 누각을 지었다는 점이다. 오십천은 발원지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50번 굽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주변의 석회암 카르스트 지대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협곡과 암벽들을 만들어 냈다. 죽서루는 오십천의 협곡이 끝나는 곳에 위치하며, 절벽 지형과 태백의 송림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다.

주소는 삼척시 성내동(城內洞)으로, 삼척 읍성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삼척 관아의 객사인 진주관(眞珠館)이 있었는데,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관동지방을 순찰하던 중에 삼척 읍성에 들러 죽서루를 관람했던 것이다. 관청으로 쓰이던 진주관은 1934년 일제에 의해 헐리고 삼척군청사가 지어졌다.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누각을 만든 사람과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고려말 문신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쓴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고려 원종 7)에 이승휴가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집이 있었다는 설이 교차한다.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는 앞면 7·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둥은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누각에는 율곡 이이를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죽서루의 모습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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