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의 북벌⑤…다시 중국을 통일하다
장제스의 북벌⑤…다시 중국을 통일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1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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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파병, 장쭤린 암살 등으로 일본 개입…동북역치로 분열 종식

 

국민당의 통합을 위해 총사령관직에서 하야했던 장제스는 4개월 반만인 192814일 원래 자리에 복귀했다. 국민당 수반이 된 왕징웨이는 내분에 휘말려 물러났고, 탕성즈도 군권을 잡으려 군대를 일으켰다가 오히려 제압당했다. 당원들이 장제스를 다시 부른 것은 그의 카리스마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국민당을 다시 결집시켜 북벌에 나섰다. 다음 타깃은 장쭤린의 영토인 산둥성이었다. 산둥성은 장쭝창(張宗蒼)이 지키고 있었다.

장쭤린은 이미 19277월에 장쭝창, 쑨촨팡의 추대를 받아 대원수에 취임했다. 장쭤린은 베이징 정권의 수반은 물론 안국군(安國軍)의 통수권자로서 북벌군과 맞섰다.

 

1927년 7월 산둥성 지난철도역을 점거한 일본군 /위키피디아
1927년 7월 산둥성 지난철도역을 점거한 일본군 /위키피디아

 

192841일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총사령관을 맡아 산둥성으로 밀고 오는 북벌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난징정부의 장제스, 서북군벌 펑위샹, 산시군 옌시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산둥성을 포위 공격했다. 양측의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보름쯤 지나면서 장쭤린의 안국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59일 장쭤린은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제 방어선은 베이징이다. 장쭤린은 장제스에게 정전을 요청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

이때 장제스의 북진을 일시 저지시킨 것은 일본군이다. 일본은 산둥성을 제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은 1차 대전중인 1914년 독일의 조차지였던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점령한 이래 산둥성을 차지했다가 민족주의에 밀려 1922년 중국에 반환했다. 일본 우파와 군부는 언젠가 산둥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북벌이 시작되자 19276월 일본 정부는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3,000명의 군대를 산둥성에 파견했다가 여론에 밀려 3개월만에 철수했다.

1928년 장제스의 복귀와 함께 북벌이 재개되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의 통일을 방해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종의 간섭전쟁에 나선 것이다. 산둥성 전투에서 북벌군이 승기를 잡자 416일 산둥성 지난(濟南) 주재 일본 무관이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즉각 파병을 결정하고 4195,000명의 병력을 산둥반도로 출병했다.

장제스와 국민당 지도부는 일본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회의에서 "일본의 출병은 북벌을 방해하려는 것인데 북벌을 먼저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국민당은 일본에 대표단을 보내 외교적 해결을 하려 시도했지만 일본은 사절단을 피하며 북벌군의 도발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였다. 북벌군은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국민과 군인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격화되었다.

장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3일 지난에서 국민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고, 3일간 전개된 충돌에서 일본군은 수십명, 중국군은 100여명 사망했다.

일본은 이 충둘을 명분으로 1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했다. 아예 장제스군과 전면전을 벌일 태세였다. 일본군은 8일 오전부터 11일까지 퇴각하는 국민혁명군을 무차별 포격하고 민간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뉴욕타임스 보도로는 6,000명의 중국인이 살해되었다. 중국에선 이 사건을 지난사건’(濟南事件) 또는 ‘5·3참안’(五三慘案)이라고 한다.

장제스는 저들의 능욕에 이를 갈았지만,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뻗을수 없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친다는 성현의 말씀을 되새기며 일본군을 피해 북진했다. (일본군은 1년간 산둥성에 머물다가 19294월에 완전철수했다.)

 

북벌군은 황하를 건너 베이징을 항했다. 59일 장쭤린은 전국에 총퇴각령을 내렸다. 528일 북벌군의 선봉부대는 베이징 남쪽 240km에 있는 창저우(滄州)에 입성했다. 펑위샹과 옌시산의 군대도 베이징을 향해 집결했다. 531일 즈리성의 성도 바오딩(保定)이 북벌군에 함락되었다.

61일 장쭤린은 베이징을 철수해 펑톈(奉天)으로 이동한다고 밝혔다.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다음날 저녁 7, 그는 부하들과 함께 전용열차에 올라 탔다. 열차는 64일 오전에 펑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가 타고 가는 철도는 징펑철로(京哈鐵路)로 베이징에서 하얼빈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황구툰(皇姑屯)역을 지났다. 황구툰역은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와 교차하는 역으로, 일본 관동군의 관할 영역이었다.

일본군은 장쭤린이 탄 열차가 지나기 몇 시간 전에 황군툰역에서 펑톈 쪽으로 몇백m 지점에 있는 철로에 폭탄을 설치해 두었다. 폭탄의 양은 600kg에 달했다. 일본군은 폭탄 설치후 중국인 아편중독자 시체 2구를 폭탄 설치 지역 근처에 던져 두었다.

 

1928년 6월 장쭤린 폭사사건 당시 황구툰 역의 파괴된 모습 /위키피디아
1928년 6월 장쭤린 폭사사건 당시 황구툰 역의 파괴된 모습 /위키피디아

 

64일 새벽 5, 장쭤린을 태운 열차가 황구툰역을 지나갔다. 조금 후,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전용열차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장쭤린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즉시 병원에 옮겼지만 그는 4시간 후인 오전 9시에 숨을 거뒀다. 그 자리에서 사망자 20, 수상자가 55명 발생했다.

일본은 자신의 범행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 사건을 남만주 모종의 중대사건’(満州某重大事件)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당시 북벌군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웠으나, 사고 지점이 일본군 관할지역이었기 때문에 발뺌하기 어려웠다. 일본측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렸으나, 정밀한 분석 결과 배후 주범이 관동군이란 심증이 굳어졌다.

20년 뒤 2차 대전 후 열린 도쿄전범재판에서 일본 육군예비역 소장 다나카 류키치는 황구툰 사건이 관동군의 소행임을 자백했다. 후에 밝혀진 일인데, 당시 주모자는 관동군 소속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였다. 이들의 음모는 장쭤린을 제거하고 말랑말랑한 장쉐량을 앞세워 만주를 장악하려 한 것이다.

장쭤린은 일본의 앞잡이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도 관동군이 요구하는대로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관동군의 한 미치광이 장교는 장제스의 북벌군의 만주 진입을 봉쇄한 후, 말 잘들을 것 같은 장쉐량을 앞세워 만주를 먹겠다고 오판한 것이다.

황구툰 사건과 별도로 관동군은 북벌군이 만주로 진입하는 것을 일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고 경고했다. 장제스도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만주로 진입해 펑톈군을 제압할 경우 일본과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했다.

 

1928년 7월 6일, 국민당 지도부가 쑨원 시신 앞에서 북벌의 완수를 선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28년 7월 6일, 국민당 지도부가 쑨원 시신 앞에서 북벌의 완수를 선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장제스는 동북3성이 국민정부를 승인할 것을 종용했다. 아버지를 잃은후 동북군을 이어받은 장쉐량도 자치를 허용한다면 국민정부를 따르겠다며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양측의 물밑협상이 진행되었다.

1928615일 국민정부는 북벌 종료와 국가통일을 선포했다. 북벌을 시작한지 111개월만이다. 수도는 난징으로 정했다. 베이징(北京)은 베이핑(北平)으로 이름을 바꾸고, 즈리성(直隷省)을 허베이성(河北省)으로 변경했다.

1928년이 끝나가는 1229일 장쉐량은 동북역치(東北易幟)를 선언했다. 이는 동북3성이 북양정권의 오색기를 내리고 국민정부의 청천백일기로 갈아 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기를 갈아단다는 것은 복종을 의미한다. 국민당 정부는 동북 3성에 대한 장쉐량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중화민국이라는 틀에서 하나의 중국을 실현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Northern Expedition

Wikipedia, Jinan incident

Wikipedia, Huanggutun incident

Wikipedia, Northeast Flag Replacement

나무위키, 국민당의 2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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