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최대 시장 열렸던 프랑스 상파뉴
중세 최대 시장 열렸던 프랑스 상파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2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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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박람회의 효시…대서양~ 지중해 교역 중계, 해로 발달로 쇠락

 

모든 사상이 기독교에 종속되고, 모든 생산활동이 농업에 고착되어 있던 12~13세기 중세 프랑스에 상업의 자유가 있었던 곳이 있었으니, 샹파뉴 정기시(Champagne fair).

샹파뉴는 샴페인을 만드는 포도가 생산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 11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백작이 샹파뉴의 지역적 특색을 활용해 수입을 올리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 정기시(fair). 정기시란 1년에 한번 시장을 열어 물건을 교환하는 장소를 말한다.

당시 주요 교역품은 모직물과 향신료였다. 모직물은 영국과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었고, 향신료는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모직물은 플랑드르 상인이, 향신료는 베네치아 상인이 거래를 했는데, 어느 쪽이든 상인들이 상품을 들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기엔 힘이 들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해로는 멀었고, 육로는 위험하고 시간이 걸렸다.

 

1154년 프랑스 지도 /위키피디아
1154년 프랑스 지도 /위키피디아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플랑드르와 베네치아의 중간인 샹파뉴에 양쪽 상인이 만나 거래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장을 만들어 줘야 한다.

샹파뉴 백작은 시장을 열었다. 처음엔 시장을 두달간 열어 해마다 정기화했다.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인근에 다른 시장을 개설했고, 이렇게 시장이 늘어나 6개가 되어 연중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시장은 파리 인근의 라니, 바르, 프로뱅, 투루아를 돌아가며 정기적으로 열렸다. 상인들은 두달마다 장돌뱅이가 되어 다른 시장으로 가서 거래를 했다.

샹파뉴 당국은 시장이라는 장소를 제공하고, 상가도 세웠으며,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을 두고 분쟁해결을 위해 재판관을 임명했다. 또 여러지역에서 오는 화폐를 교환하기 위해 환전소를 설치했다.

샹파뉴 정기시는 200년 동안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했다. 오늘날 각국의 상품이 거래되는 국제박람회(international trade fair)의 효시라 할수 있다.

거래품목은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산 직물과 동방에서 들어오는 비단, 향료, 명반, 영국과 스페인의 양모, 독일의 린넨 등이었다.

 

13세기 샹파뉴 정기시의 모습을 그린 판화 /위키피디아
13세기 샹파뉴 정기시의 모습을 그린 판화 /위키피디아

 

하지만 샹파뉴 정기시는 2세기의 영광을 뒤로 하고 13세기말~14세기초에 쇠락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중해~대서양 직항로가 개척되면서 육로로 이동하는 거래가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다. 플랑드르와 베네치아 상인들이 곧바로 해로로 이동해 교환했다.

둘째는 도시의 자유가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샹파뉴 정기시는 샹파뉴라는 지역의 독립성을 토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국이 강화되어 지방영주를 제압하면서 시장의 독립성도 상실되었다. 특히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전비를 샹파뉴에 물려 상인들이 떠나게 되어 시장의 몰락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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