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의 북벌⑥…신군벌을 제압하다
장제스의 북벌⑥…신군벌을 제압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9.2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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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정부, 중원대전에서 승리…군벌시대 종식, 공산당과 본격 대립

 

19286월 장제스는 북벌의 완성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북벌은 반쪽의 성공에 불과했다. 우페이푸, 쑨촨팡 등 북방의 일부 군벌들이 섬멸되고 장쉐량의 동북군벌이 국민당 정부에 복속했지만 군벌들의 세상은 여전했다. 국민당의 북벌은 군벌에 의한 군벌의 타도에 불과했고, 장제스도 여러 군벌의 하나였다.

북벌 성공 후 국민당에 협조한 군벌들은 신군벌을 형성했다. 신군벌은 다음과 같다.

리쭝런(李宗仁), 리지선(李濟深) 등의 광시계가 광둥, 광시, 후난, 후베이성 등을 장악했다.

펑위샹(馮玉祥)은 허난, 산시(陝西), 간쑤, 칭하이, 닝샤 등 서북지역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동부의 산둥성도 관장했다.

옌시산(閻錫山)은 산시(山西)성에 견고한 근거지를 구축하고, 북벌에 가담한 댓가로 허베이, 쑤이위안, 차하르를 손에 넣었다.

장쉐량(張學良)은 동북 3성과 러허를 차지했다.

이들은 모두 수십만명의 군대를 보유하면서 세력 범위 내에서 세금은 물론 각종 국가 자원을 빼돌렸다. 난징 정부는 장제스가 지배하는 동남부에만 영향력을 미쳤다. 장제스도 동남부에 할거하는 군벌에 지나지 않았다. 북벌 완수후 군벌을 제어하려는 자와 이에 저항하는 자의 마찰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장제스와 북벌군 장교들. /위키피디아
장제스와 북벌군 장교들. /위키피디아

 

난징정부는 중앙정부의 수입을 각 성이 유용하는 것을 방지하고, 비대해진 병력을 축소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19267월 북벌을 시작했을 때 국민혁명군의 총병력은 10만명에 불과했으나, 북벌을 마친 19286월엔 220만명으로 불어났다. 장제스의 군대도 늘어났지만 다양한 군소 군벌들이 북벌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병력이 급팽창하다보니, 군비가 정부의 연간 세입을 추월했다. 국토는 통일했지만 군인들을 먹여살리려다 나라 살림이 거덜날 지경이 되었다. 방법은 하나, 군대를 줄이는 길밖에 없었다.

북벌 완수 한달후인 1928711, 장제스는 베이징 교외 탕산에서 신군벌 수뇌들을 불러 첫 편견회의를 열었다. 편견(編遣)이란 군대 감축과 재편을 의미하는 용어다. 장제스는 병사를 노동자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인원으로 공장을 건설해 산업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군벌들이 군대 축소라는 원론에는 찬성했다. 문제는 각론이었다. 누구의 군대를 줄이느냐는 것이다. 방법론에 따라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회의를 했으나 구체적인 군축 방법을 찾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했다. 장제스는 각 진영이 군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경쟁자들은 장제스가 권력을 독점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19291월에도 편견회의가 열렸으나, 병력을 줄인다는 원칙만 결정되고, 감축량을 어떻게 할당할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국민혁명군의 편견회의 /위키피디아
국민혁명군의 편견회의 /위키피디아

 

이런 가운데 오랫동안 장제스의 동맹자였던 리쭝런이 반기를 들었다. 발단은 후난성장 자리였다. 광시 군벌인 리쭝런은 후난, 후베이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했다. 후난성장 청첸(程潛)이 자신에게 대들자 그를 해임하고 루디핑(魯滌平)을 그 자리에 올렸는데, 루디핑은 후난성의 세수를 자기에게 상납하지 않고 중앙정부에 납부했다. 리쭝런은 몹시 불쾌해 했고 군대를 보내 루디핑을 쫓아냈다. 그러자 난징 정부가 리쭝런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에 리쭝런은 광시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9293월 장제스는 모든 인사권은 중앙정부에 있다고 못 박고, 리쭝런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했다. 그는 군대를 보내 광시성 토벌을 선언했다. 광둥성장 리지선이 토벌 명령에 불복하자 난징정부는 그를 체포하고 성장에서 해임했다. 광시파의 또다른 장군 바이충시(白崇禧)도 오랜 동지인 리쭝런과 행동을 함께 했다.

하지만 리쭝런의 반란은 쉽게 제압되었다. 반란자들은 3개월만에 홍콩과 프랑스령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펑위샹은 장제스의 요청에 리쭝런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진군시키던 중에 반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때 펑위샹의 부하였던 한푸쥐(韓復榘)와 스유싼(石友三)은 상관을 배신하고 장세스의 편에 섰다. 부하의 반란에 펑위샹도 보름만에 꼬리를 내리고, 산시(山西)로 도주해 옌시산의 보호를 받았다. 옌시산은 장제스를 설득해 펑위샹의 해외 출국을 조건으로 타협안을 마련했다. 이렇게 해서 신군벌의 1차 반란은 진정되는 듯 싶었다.

 

중원대전의 주요 전투지 /위키피디아
중원대전의 주요 전투지 /위키피디아

 

신군벌을 제압한 후 난징정부는 다시 군축문제를 밀어붙였다. 192981일 난징에서 편견회의가 열렸다. 장제스는 강제로 각 파벌에 병력감축을 요구했다. 한번 패배했기 때문에 군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장제스의 군축안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1929917일 후베이성에서 광둥군벌 장파쿠이(張發奎)가 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장파쿠이의 반란은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반장제스파의 결집을 유도했다. 해외로 도주했던 리쭝런, 바이충시가 다시 거병하고, 펑위샹도 일어났다. 반장(反蔣)의 상징이었던 왕징웨이(汪精衛)가 연락이 되어 연합전선에 가담했다.

이번엔 펑위샹이 중심이 되어 반장 연합전선을 확대했다. 1010일 서북군과 산시군의 장군 27명이 편견 반대, 장제스 타도를 외치며 난징정부와 별도의 정권수립을 요구했다. 전세가 장제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펑위샹에 등을 돌렸던 한푸쥐와 스유싼은 다시 배반하고 펑위샹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장제스의 군대는 반장 연합보다 우세했다. 그는 뇌물과 회유공작으로 군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한푸쥐와 스유싼을 다시 펑위샹을 배신하게 했다.

해를 넘겨 19302월 옌시산은 자신과 장제스, 펑위샹의 동시 하야를 요구했다. 장제스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자 옌시산도 펑위샹이 주도하는 반장 연합에 가담했다. 42일 옌시산의 본거지 타이위안(太原)에서 각 파벌 대표들이 모여 장제스 토벌을 결의하고 신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왕징웨이가 정부 수반을 맡았다.

 

본격적인 전쟁은 허난, 산둥, 후베이성 일대에서 벌어졌다. 숫적으로는 반장 연합이 우세한 것처럼 보였지만, 연합세력은 단결하지 못했다. 장제스의 군대는 각개격파로 반란군과 교전했다. 19305월과 6월 장제스 군은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 펑위샹과 옌시산의 군대를 제압해 나갔다. 그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난징정부의 우세가 완연해 졌다. 리쭝런, 바이충시의 군대도 난징 정부군에 격퇴당했다.

전세가 기운 것이 분명해 진 1930918, 장쉐량의 동북군이 난징정부를 지지하며 출병을 선언했다. 동북군의 가세는 기울던 전세에 쐐기를 박았다.

장쉐량의 군대는 옌시산의 군대가 점령한 베이핑(베이징)을 되찾았다. 11월초 왕징웨이는 타이위안을 빠져 나와 도주했고, 옌시산과 펑위샹은 권력을 포기할 것을 선언했다. 장제스파와 반장 연합은 합의에 따라 펑위샹, 옌시산을 국외로 추방하기로 했다.

반장제스 군벌 전쟁은 이렇게 종식되었다. 중국인들은 이 전쟁을 중원대전(中原大戰)이라고 명명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북벌후에도 남아 있던 군벌은 사라졌다. 하지만 새로운 무장세력이 나타났으니, 바로 공산세력이다. 장제스의 국민군은 이제 본격적으로 공산당과 한판 전쟁을 벌이게 된다.

 


<참고자료>

Wikiedia, Central Plains War

나무위키, 중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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