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 석굴암 본떠 만든 서울 보문사 석굴암
토함산 석굴암 본떠 만든 서울 보문사 석굴암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02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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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돌산 깎아 조성…비구니 스님들로, 독자적인 보문종 창종

 

석굴암을 보려면 굳이 경주까지 갈 필요가 없다. 서울에서도 경주의 것과 똑같은 석굴암이 있다. 바로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보문사 석굴암이다. 규모는 경주 석굴암에 비해 축소되었지만, 비율은 그대로다.

보문사 뒷산은 낙산으로 화강암이 풍부한 돌산이다. 일제 강점기에 인근 창신동 채석장에서 돌을 캐 조선총독부, 조선은행, 경성역 등 시내 석조건축물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돌산의 특성을 확용해 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그대로 본떠 제작한 것이 보문사 석굴암이다. 19708월에 시작해 19726월에 완공되었다. 45,000여 명에 이르는 조각가와 석공이 동원되었고, 2,400톤의 화강암과 철재 25, 시멘트 1만포가 투입되었다. 주불은 15톤의 원석으로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3.38m. 전체적인 것은 경주 석굴암을 따랐으나 토함산 석굴암은 정면에 문이 하나인데, 보문사 석굴암에는 3곳에 문이 있고,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생략되어 있다.

창건될 당시에는 현관에 지붕은 덮었지만 출입구 문짝 없이 열어두었으나 지금은 유리로 가려 놓았다.

 

보문사 석굴암 입구 /박차영
보문사 석굴암 입구 /박차영
석굴암내 주불 /보문사 홈페이지
석굴암내 주불 /보문사 홈페이지

 

성북구 보문사(普門寺)는 비구니 스님들의 절이다.

고려 예종 10(1115)에 담진국사(曇眞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후 별다른 내용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영조 23(1747)에 중건되었고, 순조 24(1824)1차 중수, 고종 2(1865)2차 중수되었다. 조선시대부터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며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하는 비구니 사찰로 기록되고 있다. 모시던 왕이 세상을 떠나거나 나이가 찼을 경우 후궁과 상궁 등 궁인들이 이 절을 찾았다. 사대부, 평민도 함께 했다.

보문사는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니사(尼寺) 중 하나로, 단종의 왕비 송씨와 연관된 동망봉과 청룡사ㆍ미타사가 이웃해 있다.

 

 

보문사 정문 /박차영
보문사 정문 /박차영
보문사 정문 /박차영
보문사 정문 /박차영

 

예로부터 보문사 일대는 탑골승방이라 일컬어졌으며, 지역명인 보문동도 보문사에서 유래됐다.

현재 보문사는 1981년 입적한 은영 스님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황폐해진 보문사는 광복과 함께 은영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이후 옛 모습을 회복했다. 은영 스님은 사찰 뒤 돌산을 이용해 경주 석굴암을 조성했고,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안치한 9층 석탑을 세웠다. 보문사에 있는 은영유치원, 은영어린이집은 은영스님의 유작이다.

 

미타사 /박차영
미타사 /박차영

 

보문사는 대한불교 보문종의 본산이다. 1972년 보문사에서 이긍탄(李亘坦) 스님이 보문종을 창시했다. 대한불교 보문종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비구니 스님들로만 구성된 종단이다. 보문종은 현재 40여 개 말사에 200여명의 비구니 스님과 5만 여명의 신도를 확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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