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간 홀로 산 단종 왕비 정순왕후의 흔적들
64년간 홀로 산 단종 왕비 정순왕후의 흔적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06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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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정, 자지동천, 영도교에 전설…왕비는 단 1년, 서인으로 강등된 삶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조선 6대 임금이다. 그러면 단종의 왕비는 남편이 죽은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단종의 정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송씨로, 단종보다 한 살 많았다. 조선시대엔 왕비라도 여성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정순왕후도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와 부인 민씨의 딸로, 144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했다. 타고난 성품은 공손하고 검소했다고 한다.

그녀의 비극은 단종비로 간택되면서 시작되었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숙부 수양대군은 조카를 위하는양 단종의 결혼을 추진해 송씨를 택했다. 그 배경에는 송씨의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송씨는 14541월에 열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 단종과 혼인해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1455,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의덕(懿德) 왕대비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으로 격하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영도교 /박차영
영도교 /박차영

 

14576월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가는 남편을 마지막으로 이별한 다리가 청계천 영도교였다. 이 다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한 곳이라 해서 영이별다리, 영이별교,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를 한자화하면서 영도교(永渡橋)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청룡사 /박차영
청룡사 /박차영

 

왕위 싸움에서 정순왕후도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정순왕후는 궁궐을 쫓겨난 것은 물론 한양도성 안에도 들어가지도 못했다. 친정마저 풍비박산난 상태에서 왕후는 동대문밖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그 초암이 정업원(淨業院)이다.

 

정업원터 /박차영
정업원터 /박차영

 

정업원은 종류구 숭인동 산3번지에 위치해 있는데,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죽음을 당한 이후 이곳에서 머물며 남편의 명복을 빌다가 평생을 마쳤다. 후에 영조는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짓도록 했다. 비각 현판의 글은 영조가 손수 썼다.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前峯後巖於千萬年(앞봉우리, 뒤의 바위, 천만년을 가리).

정순왕후는 숭인동의 뒷산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영조가 이를 애도한 것이다.

 

동망정(신축) /박차영
동망정(신축) /박차영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어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했다. 왕후는 1521(중종 16) 6월에 82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는데, 단종 사후 64년을 홀로 살았다. 단종과 왕후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

단종 사후 신분은 서인으로 전락했지만 세조가 양심은 있었던지, 노비로 사역하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고 한다.

단종이 죽은후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했다. 일제 시대에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활용되면서 바위는 깨어져 버렸다. 2011, 근처에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건립되어 있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그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었는데, 궁에서 알고 이를 말렸다. 이에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울 자지동천 /박차영
서울 자지동천 /박차영

 

정순왕후는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낙산의 화강암 바위 밑에 샘물이 흘러 나오길래 그 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물이 들었다 한다. 왕후는 시녀와 함께 자주동샘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 명주를 널어 말렸다. 현재 창신동 쌍룡 2차 아파트 부근 낙산공원에 비우당이란 초가집에 가려져 있는 바위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샘물 터가 남아 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정순왕후 능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 /문화재청
정순왕후 능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 /문화재청

 

중종의 재위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됐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기가 일렀던 것이다. 현종 때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단종과 왕후의 복위를 거듭 건의했다. 그 건의로 1698(숙종 24) 정순왕후로 복위되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정순왕후는 죽은후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매장됐다. 복위 후에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그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쪽을 향해 고개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 숭배됐는데, 무속에서는 그를 송씨부인 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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