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C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명나라 유민 康世爵
17C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명나라 유민 康世爵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0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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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서 후금과 전투에서 패배후 조선에 망명…함경도에 살며 귀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화제가 되었다. 전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유민을 낳았고, 생활터전을 잃은 피란민들은 이웃나라로 이주를 했다.

17세기초 명청교체기에 요동지방에서 살던 많은 명나라 한족들이 만주족 청나라에 쫓겨 조선으로 이주해 왔다. 그중 조선사회에 유명세를 탄 명나라 유민이 강세작(康世爵)이다.

 

강세작을 주제로 다룬 당대의 전기만 해도 4개나 된다. 박세당, 남구만, 김몽화가 康世爵傳이란 동일한 제목의 글을 남겼고, 최창대가 康君世爵 墓誌銘을 지어 주었다. 박세당과 남구만은 함경도 수령으로 근무하며 강세작을 만났고, 김몽화와 최창대는 그를 만나보지도 않고 그의 스토리를 썼다. 박세당, 최창대는 이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강세작을 소재로 한시도 남겼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도 강세작에 대한 얘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겼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초반 도강록(渡江錄)에 강세작 이야기를 소개했고, 김경선의 연원직지에도 강세작의 이야기가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정에서 강세작의 후손을 돌봐줬다는 기사가 10군데나 나온다.

당대에 강세작은 현대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처럼 조선 사대부 사회에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619년 명군과 후금군 사이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도 /위키피디아
1619년 명군과 후금군 사이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도 /위키피디아

 

17세기초 요동지역은 명나라와 후금이 대치하며 정권교체의 전란에 휩쓸려 있었다. 요동은 조선과 국경을 접해 있었고, 지정학적으로 두 나라의 전투는 조선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1618년 후금이 푸순(撫順)을 공격해 점령했다. 명 황제는 조선에 임진왜란 때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구실로 원군을 요청했다.

1619년 광해군은 마지못해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원정군을 편성해 파견하면서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명연합군은 심하(深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강홍립도 항복했다.

1621년 요동 전체가 후금에 점령당하자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평안북도 철산 앞바다 가도(椵島)를 점령하고 후금에 저항했다. 후금의 팽창과 모문룡의 가도 점령의 영향으로 10만명 이상의 요동난민이 청천강 이북 조선 역내에 밀려들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친명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명나라 유민의 입국이 더욱 가속화했다.

1625(인조 3)에 강세작이 조선 땅을 밟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쯤으로 파악된다.

 

강세작은 양쯔강 유역 장저우(荊州)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강임(康霖)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하기 위해 파병된 명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평산(平山)에서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 강국태(康國泰)는 청주통판(淸州通判)이란 벼슬을 하다가 죄를 지어 요동으로 귀양을 갔는데, 강세작도 아버지를 따라 18살에 요동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명나라에서 사대부 출신 자제였다.

요동에 오자마자 아버지는 후금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 강세작도 아버지를 따라가 부친의 사망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숨어 있다가 날이 저물자 아버지 시신을 찾아 산골에 대충 묻고, 근처에 투입된 강홍립의 조선군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홍립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채 후금군에 투항해 버렸다. 후금군은 조선병사 사이에 섞여 있던 명나라 병사를 골내내 모조리 죽여버렸다. 장세작도 죽음을 면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세작은 포박당해 바위 밑에 버려졌다.

강세작은 돌 모서리에 비비적거려 포승줄을 끊고 죽은 조선 병사 웃을 벗겨 입고 조선 병사들 속으로 들어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세작은 심양(瀋陽)으로 갔지만 심양성이 함락되자 탈출해 요양(遼陽)으로 갔다. 요양성이 함락되지 산으로 도망쳐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렀다. 세작은 봉황성에서 명군 패잔병 부대에 합류해 성을 지켰으나 전투에 패배해 중상을 입었다. 그는 조선으로 갈 것을 결심해 16258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평안도 여러고을을 떠돌다가 함경도 회령 부근에 정착해 조선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고 84세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강세작은 조선에 정착해 살면서 토착인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세당의 전기에 따르면, 강세작은 술을 좋아해 친분이 있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면 술을 달라해 흠뻑 취한 뒤에 떠나갔다고 한다. 고을 수령 가운데 세작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 떠도는 것을 아타깝게 여겨 후하게 대우해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명나라 상층계급 출신이라도 조선 땅에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강세작은 경원부(慶源府) 기생과 통정(通情)해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고(숙종 14, 1688), 남구만의 전기에는 그가 역비(驛婢)를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강세작의 후손들을 속신(贖身)해줄 것을 요청하는 함경도 관찰사 남구만의 장계가 기록되어 있다. (숙종 14) 이는 세작의 후손들이 힘들게 살아가다 노비로 전락했으니, 몸값을 주어 노비 생활을 면하게 해주자는 얘기다. 청나라에 굴복하면서도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사대부들의 소중화주의 잔재도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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