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보다 베트남에서 더 유명했던 이수광
조선보다 베트남에서 더 유명했던 이수광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0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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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으로 명에 세 번 파견되어 베트남, 류큐 사신과 교우…지봉유설 저술

 

조선 중기의 문신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본국에서보다 베트남에서 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이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경남 진주의 선비 조완벽(趙完璧)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베트남과 오키나와를 다녀온 스토리가 실려 있다. 조완벽은 일본의 무역상인에게 팔려가 한문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베트남 선비들 사이에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완벽은 훗날 고국으로 송환되어 이수광이 자신의 시가 베트남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기록해 두었다.

 

이수광은 1597년에 진위사(陳慰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사신들의 숙소인 옥화관에서 안남(安南) 사신 풍 칵 꽌(馮克寬)을 만나 50여일간 교류하며 시를 지었고, 이후 그의 시가 베트남에 소개되었다.

두 사절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에게 명 황제에게 바치는 시집(萬壽慶賀詩集)의 서문도 써 주었다. 고국에 돌아간 풍 칵 꽌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조완벽이 일본의 포로가 되어 베트남에 갔을 때, 베트남 고관은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책을 하나 꺼내면서 이 책은 당신네 나라 이지봉(李芝峯, 지봉은 이수광의 호)이 쓴 시인데, 당신은 알겠지요라고 묻는다. 조완벽은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하자 베트남 고관이 서운해 하며 그 책자를 보여줬다. 조완벽이 그 책을 보니, 첫머리에 이수광의 시가 실려 있었다.

베트남 고관은 또다른 책을 꺼내면서 이 책은 귀국 이지봉이 쓴 책인데,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조완벽은 베트남 유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이수광의 시를 외우고 있더라고 전한다.

 

임진왜란을 당해 이수광은 국제적으로 시야를 넓혔다. 1611년 그는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류큐(琉球, 오키나와) 사신과 섬라(暹羅, 태국)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했다. 이수광은 북경에서 류큐 사신을 만나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문답하고 시를 주고받으면서 우호를 증진하는 민간 외교의 역할을 했다.

 

서울 종로구 총신동의 비우당 /박차영
서울 종로구 총신동의 비우당 /박차영

 

이수광의 흔적은 종로구 창신동 낙산 아래에 작은 초가집에서 찾을수 있다. 서울에 웬 초가집?

비우당(庇雨堂)이란 이름의 이 초가집은 원래 창신동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가 낙사농원을 조성하면서 이 곳에 복원했다. 비우당은 이수광의 외가 5대조인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유관은 청렴한 문신으로 낙산 산꼭대기에 초가집에서 살았다. 이 집은 비가 오면 유관이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 해서 비우당이라 했다.

유관의 후손이 이수광의 어머니인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집을 이수광이 재건축해서 지은 집이다. 이수광은 비우당 부근의 상산(商山) 한봉우리인 지봉(芝峯)에서 호를 땄다. 낙산의 어느 한 봉우리 쯤 되는 것 같다. 현재 종로구 창신동 일대의 지봉로는 여기서 유래한다.

이수광은 유년 시절에 비우당에서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으며, 16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진사시를 거쳐, 23세에 문과 시험에 합격했다.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승문원을 시작으로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요직을 거쳐 28세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을 맞았고,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불화를 직면해야 했다. 이수광은 당색을 멀리했기 때문에 중도의 입장을 취햇고, 광해군 시절에 폭정을 보다 못해 관직을 그만 두고 비우당에 은거했다. 이때 51세였다.

광해군은 대사성의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의 명저 지봉유설은 비우당에 은퇴했을때인 1614(광해군 6)에 완성되었다.

 

이수광이 52세에 완성한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다. 책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걸쳐 이루어졌다.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 사절로 가서 얻은 경험과 평생 동안 수집해 온 국내외 다양한 자료들이 정리되었다.

20권으로 이루어진 지봉유설은 천문·지리·역사·정치·경제·인물·시문·언어·복식·동식물 등을 포괄했다. 3,435 항목에 달하는 사전적 지식이 망라되고, 등장인물만 해도 2,265명에 달한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이수광 묘 /문화재청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이수광 묘 /문화재청

 

1616년 관직에 복귀해 지방관을 잠시 맡기도 했지만 중앙관직은 기피했다. 이수광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중앙관직에 복귀해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등 고위관직을 맡다가 1628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다.

 

현대의 국사학자들이 조선 중기 실학의 원천을 찾던 중에 지봉유설에 주목하게 되었다. 지봉유설이 관념적 성리학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에 집중한 것에서 실학이 시작되었다는 4견해다. 어쩌면 이수광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재탄생한 것이라 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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