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대 최대 제철단지…삼국 각축의 배경
충주, 고대 최대 제철단지…삼국 각축의 배경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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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조사에서 3~4세기 제련로 14기 추가확인, 모두 25기…지하 연소시설 갖춰

 

충청북도 충주 칠금동 땅속을 파보니, 고대 철() 제련로의 터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현재까지 이 곳에서 제련로 14기가 새로 발굴되었다. 2016년부터 시작된 발굴 과정에서 모두 25개의 제련소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까지 발굴 결과로만으로도 고대 철 제련단지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충주는 남한 지도를 놓고 보면, 국토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지정학적으로 요충지다. 영남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도착하는 곳이며, 또 외적이 영남을 공격할 때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다. 남한강 수운을 활용해 한강 하류로 연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충주의 명물 탄금대(彈琴臺)는 대가야 출신 우륵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야금으로 연주하다가 신라 진흥왕이 그 소리를 듣고 탄복했다는 곳이다. 충주 시가지 서북쪽 칠금동,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곳에 해발 200m의 야트마한 산에 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고대 제철 기술을 재현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고대 제철 기술을 재현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그곳에 우리가 아는 다른 역사적 유물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바로 철()을 제련하는 시설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충주 칠금동 탄금대 뒤쪽(남쪽) 경사면 지역을 대상으로 고대제철시설 복원사업을 위해 그동안 1, 2차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번 3차 조사에서 제련로가 산 아래에서 위로 순서대로 축조되었음이 파악되었다. 먼저 가장 낮은 지역에서 제련로가 만들어진 다음(하층), 중층에서 제련로가 만들어졌고, 중층 제련로의 수명이 다되면 폐기한 후, 그 위에 다시 제련로를 새로 축조한 것(상층)이 확인되었다.

또 북쪽과 서쪽의 상층 지형에서는 유구가 복잡하게 중복된 양상도 다수 확인되었다. 이는 각 유구들이 지하시설을 공유하고, 단단하게 형성된 지반을 재사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고 있다.

제련소는 목탄을 가져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실시해 보니 서기 3~4세기로 파악되었다. 중원문화재연구소는 백제의 제철기술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목탄의 방사성 탄소연대측정(AMS) 결과, 100여 년간의 장기 조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 장소에서 장기간 조업으로 철을 생산한 것은 주위에 철광산지가 있고,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 연료(목탄)를 쉽게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사팀은 충주 제철유적이 한강 수운(水運)을 통한 유통망이 발달한 충주만의 탁월한 지하자원과 입지 조건 덕분으로 충주가 고대 백제뿐만 아니라 고려조선 시대까지도 국내 제철생산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과거 국내 3대 철 생산지는 충주, 울산, 양양이었다.

 

충주 칠금동 발굴조사 유구 배치도(1~3차) /문화재청
충주 칠금동 발굴조사 유구 배치도(1~3차) /문화재청

 

고대에 충주에 최대 철 제련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시대에 충주 일대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것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마한 연맹체에 속해 있었다가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그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무너뜨린 후 충주 지역까지 진격했다.(475) 고구려는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수도 다음가는 도시로 승격시키고 남한강 일대와 신라 정벌의 중심지로 삼았다. 당시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성공을 기린 척경비로 충주 고구려비가 남아있다.

그후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진흥왕 시절에 단양을 점령하고, 그곳에 적성비를 세웠다.(550) 곧이어 충주는 신라에 넘어간다. 신라도 고구려처럼 충주를 국원(國原)이라고 부르고, 경주 다음 가는 소경(小京)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신라와 고구려가 충주를 제2의 수도로 삼았고, 백제가 이 곳을 선점한 까닭은 바로 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은 고대인에게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무기는 구리보다 뛰어났고, 철로 만든 농기구는 금새 무뎌지는 청동기보다 강하여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철은 녹이 잘 슬어 장신구로서의 매력은 적었지만, 지배자 집단에겐 철이 매력적이었다. 철을 확보한 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잉여 생산물을 확보할수 있었다. 고대 고분에서 나오는 무수한 철정(鐵鋌, 쇳덩이)는 고대인들이 철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를 알수 있다.

역사 기록에는 가야에 철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 (), ()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할때에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된다.”(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고대에는 철이 화폐로도 사용된 것이다.

가야는 철을 생산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침공이 잦았다. 일본서기의 주장에 따르면 왜는 가야를 속국화하려 했고(임나본부설), 고구려가 5만의 군대로 가야를 침공하고(광개토대왕비), 가야는 나중엔 신라와 백제에 의해 갈기갈기 해체됐다.

충주도 철광석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각축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충주의 입지 /충주시청 사이트
충주의 입지 /충주시청 사이트

 

이번 발굴조사에서 제련로에 칠금동 유적의 특징인 지하시설의 존재가 밝혀졌다.

제련로를 축조하기 이전에 먼저 넓게 땅을 파고 그 바닥에 긴 목탄들을 가로와 세로로 교차 배치해 빼곡이 채우고 벽면에도 목탄을 박았다. 지하시설이 만들어 진 다음에 그 위에 흙을 다져 채우고 가운데를 다시 파서 제련로의 본체를 축조했다. 지하시설은 노의 하중을 지탱하고,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는 방습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또 철광석이 녹으면 철은 노() 내에 뭉쳐지고, 불순물인 슬래그는 노 밖으로 배출되는데 이때 슬래그(Slag, 철 찌꺼기)가 쉽게 배출 시키고자 배출 부위를 점토다짐으로 경사로를 만들고(16호로), 경사로 하단에 작은 구덩이를 만든 사례(17호로)도 확인되었다.

 

왼쪽부터 16호로와 17호로 /문화재청
왼쪽부터 16호로와 17호로 /문화재청

 

충주는 신라 지배세력의 하나인 김씨 족단이 남하하는 길목이었다는 점에서 충주 제철시설이 신라의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역사학자 강종훈은 저서 <신라상고사 연구>에서 김씨 족단이 소백산맥 남쪽의 경북 영주를 발상지로 하고, 소백산맥 이북의 충주, 괴산, 보은, 소백산맥 이남의 상주, 문경을 세력권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흥왕때 김씨 왕족들은 충주를 국원(國原)’이라 부르며, 소경(小京)으로 삼아 서라벌의 귀족자제와 육부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국원은 나라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김씨 세력의 유서가 깊은 곳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충주 제철 유적지가 김씨 왕족들이 경주에 입성하기 앞서 철기 문화를 구축하며 세력을 확보했던 지역의 유물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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