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는 왜 판첸라마를 부정적으로 서술했나
열하일기는 왜 판첸라마를 부정적으로 서술했나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1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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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지키기 위해 라마교 수장에게 절하길 거부…외교적 실패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하이라이트는 조선의 사신이 청의 황제와 티베트 불교의 판첸라마를 만나는 대목이다.

1780년은 조선에서는 정조 4, 중국 청에선 견륭(乾隆) 45년이다. 음력 811일 조선 사신단의 정사 박명원(朴明源)과 부사 정원시(鄭元始)가 칠순을 맞는 건륭황제를 알현했다.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의례적으로 국왕 정조의 근황을 묻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황제는 군기대신을 통해 그대의 나라에서는 부처를 공경하는가? 사찰(寺刹)은 몇 곳이나 있고 또 관제묘(關帝廟, 관우의 묘)도 있는가”’라고 물었다.

정사 박명원은 우리나라의 풍속은 본래 불교를 숭상하지 않고 사찰은 서울과 지방에 더러 있으며 관제묘는 도성 밖에 두 곳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박명원의 대답인즉,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므로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곧장 타시룬포(札什倫布)로 가서 액이덕니(額爾德尼)를 만나라고 지시했다. 타시룬포는 ;판첸라마가 살고 있는 사찰이고, 액이덕니는 판첸라마의 호였다.

조선의 사신단은 라마교의 수장 판첸라마를 만나야 할지를 의논했다. 성리학을 원리로 삼는 나라의 사신이 사이비 종교의 수장을 찾아 절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국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판첸라마를 받들기 위해 황제가 열하까지 행궁을 옮긴 터였다.

 

3대 판첸라마(1505~1556) /위키피디아
3대 판첸라마(1505~1556) /위키피디아

 

건륭제(재위, 1736~1799)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동쪽으로 사할린섬에서 서쪽 신장(新疆), 북쪽 외몽골, 남쪽으로 베트남, 네팔, 타이완, 미얀마까지 평정했고, ‘사고전서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해 문화사업을 벌였다. 건륭제는 말년에 스스로를 열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긴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며 자화자찬했다.

건륭제는 위대함은 대량살육을 통해 이뤄졌다. 한자어로 ’()라는 글자는 완전히 없애다는 뜻인데, 건륭제는 신장지역 준가르 공격을 지시하면서 장수들에게 이 글자를 여러차례 내려보냈다. 어물쩡 준가르 부족민을 살려준 장수는 갈아치웠고, 적을 초토화한 장군에게는 상을 줬다. 그는 끝까지 저항한 준가르 부족을 말살시켰다. 청군의 토벌작전에 준가르 부족의 80%가 학살되거나 질병, 기아 등으로 사망했다. 서방의 학자들은 죽은 숫자가 50~8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박지원 일행이 청의 여름수도를 방문한 때는 건륭제가 신장에서 몽골족의 한 부족인 준가르족을 소멸시킨지 20년 후였다. 건륭제는 청조에 순응하는 몽골족을 포용하되, 저항하는 몽골족은 몰살시켰다. 그에게 몽골족은 한족보다 더 끈질기게 저항한 민족이었다. 당시 몽골족은 티베트불교인 라마교를 믿고 있었고, 건륭제는 라마교를 우대함으로써 몽골족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열하로 행차하는 건륭제 /위키피디아
열하로 행차하는 건륭제 /위키피디아

 

라마교에서 판첸라마는 달라이라마를 잇는 2인자로, 타시룬포(札什倫布) 사원의 수장을 맡고 있다. 당시 달라이라마 8세가 어려 판첸라마 6세가 라마교와 티베트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었다.

판첸라마 6세도 건륭제의 70세 생일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로 왔다. 건륭제는 자신의 생일축하를 위해 온 판첸라마를 황제와 대등한 대우를 하면서 몽골족과 티베트에 대한 통치력을 보여주려 했다. 건륭제가 조선의 사신들을 판첸라마에게 인사시키고자 한 것은 동방의 예의지국도 라마교에 경배를 한다는 사실을 몽골족에게 과시하려는 속셈이었다.

황제의 그런 뜻을 조선의 사신들이 모를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신들이 불교의 수장에게 삼배구고두를 했다는 고국에 전해지만 경을 칠 일이다.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지 100여년이 넘었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을 야만족으로 보고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시절이었다.

 

열하의 피서산장 /위키피디아
열하의 피서산장 /위키피디아

 

이날 박지원은 아침부터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되놈들이 보는 앞에서 쿤 잔에 술을 부어 거침없이 입에 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되놈들이 경탄해 자기들 잔을 주자 석잔을 단숨에 부어 넣었다.

숙소에 돌아오자, 하인에게서 정사와 부사가 살아있는 부처’(活佛)를 만나러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박지원은 큰 구경거리가 난 듯 싶어 8촌 형인 정사 박명원을 찾아 나섰다. 박지원은 구체적인 보직이 없는, 군관자녀 자격으로 사신단에 끼었기 때문에 황제의 궁궐에는 가지 못했지만, 판첸라마의 거처에는 갈수 있었다. 라마교 사원에 도착해보니, 마침 정사와 부사가 판첸라마를 만나기 직전이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판첸라마를 만난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연암은 판첸라마에 대해 영민하거나 준걸스러운 기상이 없었다”, “피부 색깔은 짙은 황색에 압도돼 황달병에 걸린 사람처럼 누렇게 떠 있었다”, “흐리멍덩한 모습이 무슨 물귀신의 화상을 보는 것 같았다며 비하하는 표현을 썼다. 박지원에 대해 후세 역사학자들이 실학자로 구분하며 새로운 학문을 한 것처럼 서술하지만 그도 성리학자의 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열하일기에 따르면, 판첸라마에게 고두례를 시행하는 문제에 대해 조선 사신이 청 예부(禮部)"천자를 공경하는 예법을 어떻게 서번(西蕃, 티베트)의 승려에게 하란 말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청의 군기대신이 조선 사신에게 판첸라마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라고 신호를 보냈으나 사신은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 절을 않고 그냥 앉았다. 군기대신이 당황했으나 사신이 이미 앉고 말아 어쩔수 없어 그냥 넘어갔다고 열하일기는 기록했다.

조선 사신들은 외교적으로 큰 결례를 한 셈이다. 하지만 성리학자가 불승(佛僧)에게 고두례를 할 수는 없었고, 국내에 그 소식이 전해지만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껏이다. 정조실록(1780917)에 진하겸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의 장계가 기록되었는데, 라마교 판첸라마를 만났다는 보고가 없다. 사신들이 잘 한 것만 보고하고 책 잡힐 일은 감추었던 것이다.

 

열하에 세워진 라마교 사원(普陀宗乘之庙)의 금빛 지붕 /위키피디아
열하에 세워진 라마교 사원(普陀宗乘之庙)의 금빛 지붕 /위키피디아

 

박지원은 판첸라마의 타시룬포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열하일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태까지 금기와로 지붕을 이은 것은 보지 못했다. 지금 이 전각을 덮은 기와가 순금인지, 도금인지를 알수가 없었다. 2층 대전이 둘, 다락 하나, 문 셋, 그리고 나머지 전각은 여러 빛깔로 된 유리기와이다.”

 

판첸라마에게 절을 하지 않은 일을 계기로 조선 사신들은 청나라에서 찬밥 신세가 되엇다.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선 사신들은 썰렁한 분위그를 감지했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번 열하로 갈 때 군기대신이 나와 맞이하고 낭중이 강을 건너는 일을 감독했다. 그리고 제독과 통관들은 기세가 당당하게 채찍을 들어 친히 지휘했었다. 그런데 지금 연경(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근신(近臣)의 호송도 없거니와 황제 역시 한마디 위로의 말도 없었다. 분명 사신들이 부처님(활불) 뵙기를 꺼려한 까닭으로, 이런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너무 달랐다.”

 

열하일기의 행로 /열하일기(김문서 역) 캡쳐
열하일기의 행로 /열하일기(김문서 역) 캡쳐

 

박지원은 문장력으로 이 실패한 외교를 커버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8촌형 박명원이 사신단 정사가 된 것을 연줄로 박지원은 나이 44세의 늦은 나이에 북경 구경을 하기 위해 건륭제 칠순잔치 축하사절단에 끼어든다.

그는 정조 4(1780) 6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데서 시작해 요동, 성경(심양), 산해관, 연경(북경)을 거쳐 열하로 갔다가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820일까지 2개월 가까운 기간에 겪은 일을 날짜 순서대로 적었다. 열하일기는 까 연행(燕行)에서 돌아온 후 약 3년에 걸쳐 씌어 졌는데 한편 한편 나올때마다 선비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었고, 여러권이 필사되어 세간에 읽혔다.

 


<참고자료>

열하일기, 김문서 역, 2008년 돋을새김

법보신문, ‘열하일기의 판첸라마 고두례 거부 사건 진실은(2019.3.21.)

維基百科, 扎什伦布寺

Wikipidia, Panchen L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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