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내전③…마오쩌둥 실각
제1차 국공내전③…마오쩌둥 실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0.2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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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국민군 토벌을 막아냈으나, 소련파의 견제로 권력에서 배제

 

19286월 장제스가 북벌을 종료하고 통일을 선언했을 때, 공산당원들은 전국적으로 무장투쟁을 일으키고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장제스의 입장에선 나라를 갈라 먹었던 군벌들을 소멸시켰더니, 이젠 공산당에 의해 중국이 분열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는 공산당을 싹부터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민당은 군벌 토벌에 나섰던 병력을 새로운 내전, 즉 공비(共匪) 토벌에 투입했다.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작전은 193012월부터 1934년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 기간 중에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국토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상황에서도 국민당은 공산당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전개했다. 항일투쟁보다는 계급투쟁에 몰두했다. 이 국공내전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해 내륙 깊숙한 곳의 중국 심장부에 칼을 꽂을 때까지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이 중공당 소멸을 막아준 결과로 귀결되었다.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은 펑위샹(馮玉祥옌시산(閻錫山리쭝런(李宗仁)의 반()장제스 신군벌 연합을 제압한 이후, 1930년 말에 시작된다. 국민당의 분공(分共) 조치는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을 유발했고, 이들은 군벌전쟁의 내란기를 이용해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소비에트를 세웠다.

국민당안 공산당 토벌작전을 초공(剿共)작전이라고 했다. ()완전히 없애다란 뜻의 한자인데 공산당 세력을 소멸시키는 작전이다.

1차 초공은 19301219일부터 이듬해 13일까지 보름간 전개되었다. 1차 작전에서 국민군은 공산군을 얕잡아 보다가 사령관이 포로가 되어 처형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두 번째 초공은 193141일부터 두달간 진행되었지만, 국민군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3차 토벌작전은 193171일부터 그해 920일까지였는데, 9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며 만주사변을 도발하는 바람에 국민군이 공격을 멈춤으로써 중단되었다.

국민군의 세차례 토벌을 막아낸 것은 마오쩌둥의 전술이 탁월했다는 반증이었다. 마오쩌둥은 적을 깊숙한 곳으로 유인해 각개격파하는 유격전술로 국민군을 궤멸시켰다. 또 홍군은 홍콩에서 입수한 무전기와 소련에서 훈련받은 무전기술자들을 바탕으로 국민혁명군의 통신을 도청하며 국민혁명군의 작전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다.

국민군의 토벌을 버텨내자, 마오쩌둥은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공산당 지도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공산당원 사이에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1931117일 마오쩌둥은 그간의 공로를 내세워 루이진(瑞金)에서 중화 소비에트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27년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1927년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국내파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이 급부상하자, 소련유학생 출신의 볼셰비키파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소련파들은 자신들이 정통 공산주의 이론에 충실하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의 논리를 비정통으로 몰아 세웠다.

마오쩌둥은 토지개혁에서 토지를 부농과 소지주, 빈농에게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데 비해 볼셰비키들은 부농들을 토지분배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반박했다. 마오쩌둥은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아직 공산적 토지혁명을 할기에 역부족이므로 대토지소유자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의 게릴라전에 대해서도 볼셰비키들은 반대했다. 마오쩌둥은 공산군이 국민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약세이므로 전면전을 피해야 하며, 그 대안으로 유격전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비해 볼셰비키들은 홍군이 충분한 역량이 있으므로 진지전을 통해 국민군과 정면승부를 보아야 한다고 맞섰다. 머리 속에 이념으로 가득찬 원리주의자들은 마오쩌둥에게 계급의식이 동요하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박약하다고 몰아 세웠다.

 

왕밍(왼쪽)과 보구(오른쪽) /위키피디아
왕밍(왼쪽)과 보구(오른쪽) /위키피디아

 

만주를 일분군에 넘겨준 후 국민군은 국토회복에 나서지 않고 총구를 공산세력에 돌렸다. 국민군은 19324월부터 제4차 초공작전을 벌였다. 국민정부는 이번엔 단기전으로 끝내지 않았다. 작전에 투입한 병력도 60만명으로 늘리고 해군과 공군도 동원했다.

국민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는데도 공산진영은 당내 내분에 휘말렸다. 소련 유학파의 핵심인물은 왕밍(王明)과 보구(博古)였다. 왕밍은 중국에 반자본주의, 반부농의 혁명적 상황이 고조되었으며, 전국적인 공세노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을 토해내며 이론적으로 미숙한 공산당원들의 기를 제압했다. 게다가 모스크바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32년말경 국민당의 대대적인 멸공 정책으로 상하이에 근거지를 잃게 되자 당지도부가 속속 루이진으로 스며들었다. 보구를 비롯한 정치국원은 물론 코민테른의 리더(李德)가 루이진에 도착했다. 왕밍은 모스크바에 가 있었고, 보구가 왕밍의 조정을 받고 있었다.

당 중앙은 마오쩌둥을 집중 공격했다. 좌경선동가들은 적을 깊은 곳으로 유인하는 전략(誘敵深入)을 포기하고 홍군이 포위되기 전에 먼저 백색지역(국민군 점령지)으로 출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반대했다. 볼셰비키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마오를 실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국민군의 4차 초공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193210, 중공은 소비에트 전국대표대회를 열어 홍군에서 마오쩌둥의 지도적 지위에서 배제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주더(朱德)가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볼셰비키파들은 끝내 마오쩌둥의 군 통제권을 잘라 버렸다. 홍군의 지휘권은 저우언라이와 주더에게 넘어갔다.

비록 마오쩌둥이 실권했지만, 주더는 마오의 전술을 계승해 유격전으로 국민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국민군의 4차 공격은 이전과는 질적, 양적으로 달랐다. 이듬해인 1933년초, 국민군은 소비에트 수도인 루이진을 조여 들어왔고, 공산군은 징강산으로 쫓겨 들어갔다. 국민군의 공세가 더 진행되면 소비에트의 뿌리가 뽑힐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 반전이 일어났다. 만주를 집어 삼킨 일본이 1933223일 내몽골 러허성(熱河省)을 집어삼키기 위해 전쟁을 개시했다. 이른바 열하사변이다. 만주에서 쫓겨난 동북군벌 장셰량(張學良)의 마지막 거점도 위태로워 졌다.

이번에도 일본이 공산군을 도와줬다. 장제스는 군대를 항일 전선으로 돌리기 위해 공비 토벌을 중단했다.

 

중국 소비에트군의 퍼레이드(1931) /위키피디아
중국 소비에트군의 퍼레이드(1931) /위키피디아

 

국민당 정부는 밖으로는 남진하는 일본군에 대항하고, 내부적으로는 공산당 세포들과 싸우는 두 개의 전쟁을 치렀다. 장제스는 네 번의 토벌을 통해 공산 소비에트의 본질을 파악해 나갔다. 장제스는 중공 문제의 본질을 정치문제로 파악했다. 그는 수복지구에 향촌을 재건하고 마을을 통제하는 보갑(保甲)제도를 실시, 농민이 공산당 선동에 녹아내리지 않게 방비했다. 아울러 국민당은 일시적으로 토벌을 중단했지만 제5차 토벌을 준비했다. 일본군이 장성을 넘어 남하하기 전에 전에 공산당을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공산진영에서는 4차 초공기간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은 거의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마오쩌둥이 실각한 이후 상하이에 있던 당 중앙은 국민당의 검거열풍을 피해 루이진으로 이동했다. 루이진이 소비에트의 중심이자 당 중앙이 되었다. 당은 국제파라 불린 볼셰비키 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참고자료>

-현대 중국사(하권)-인민의 탄생과 굴기, 이매누얼 C.Y. , 까치, 2013

Wikipedia, Encirclement campaigns

나무위키, 초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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