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내전④…5차 초공작전
제1차 국공내전④…5차 초공작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0.2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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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브라운의 작전 실패로 공산당, 장시 근거지 잃고 패주…장정 시작

 

국민당은 19331016일 제5차 공산당 토벌(초공)작전을 시작했다. 국민당은 작전 개시에 앞서 4차례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하게 준비했다. 1, 2차 초공(剿共)은 준비 미숙으로 실패했고, 3차와 4차는 일본의 침략이 일으킨 만주사변, 열하사변으로 중단되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륙으로 침공해 오기 전에 내부의 적을 소멸시키겠다고 작정했다.

장제스는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중앙군 70~75만명에 지방군을 합쳐 100만 대군을 준비시켰다. 장제스는 장시성 난창(南昌)에 토벌군 사령부를 두고 자신이 직접 사령관을 맡아 진두지휘하겠다고 나섰다. 또 소비에트가 설치는 광둥, 장시, 푸젠, 후난, 후베이 등 5개 성에 군정을 실시했다.

장제스는 공비 준동의 본질이 민심 이반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군사적 대응보다 정치적 대응이 중요하다며, “군사 3, 정치 7의 비중을 강조했다. 이런 판단 하에 국민당은 소비에트 수복지역에 정예장교들을 투입해 농민 선무 활동 등 정치공작을 강화했다. 또 서둘러 공산당 지역으로 진격하지 않고, 탈환지역에 콘크리트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며 서서히 조여들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하면 마오쩌둥의 유격전술을 막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스 폰 젝트(왼쪽)와 오토 브라운(오른쪽) /위키피디아
한스 폰 젝트(왼쪽)와 오토 브라운(오른쪽) /위키피디아

 

흥미로운 사실은 양측이 모두 군사고문으로 독일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장제스는 1933년 독일의 유명한 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장군을 군사고문으로 초청했다. 폭 젝트는 중국 공산군에 대한 포위 섬멸 작전을 제안했다. 이 무렵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에 성공했는데, 장제스 정권은 나치정권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독일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고 군사고문단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독일 고문단 책임자로 폰 젝트를 임명했고, 그가 건강상 이유로 사직한 후에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 장군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모슝 /위키피디아
모슝 /위키피디아

공산당에는 코민테른에서 독일인 오토 브라운(Otto Braun)을 군사고문으로 보냈다. 브라운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방식을 배격하고, 병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 한 방향에서 공격하고 다른 방향은 견제만 해서 병력의 기동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운은 당내 볼셰비키파 실세인 보구(博古)와 죽이 맞아 사실상 소비에트군을 지휘했다.

공산진영은 국민당 핵심에 첩자를 두고 있었다. 모슝(莫雄)은 쑨원 시절부터 국민당원으로 활동했으며, 공산당의 비밀요원이 되어 국민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다. 공산당 핵심은 국민군의 동태를 모슝을 통해 훤히 알고 있었다.

 

5차 초공작전은 장제스의 직접 지휘에 의해 전개되었다. 병력수에서 국민군은 홍군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500여대의 비행기를 동원해 홍군의 거점을 타격했다. 국민군은 홍색지구에 모든 보급을 차단했다.

국민군은 성급하게 적진 깊숙이 진격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일보 전진한 후 토치카를 쌓았다. 공산군이 공격해도 콘크리트 구조물이 국민군을 방어해 주었다. 국민군은 잇달아 공산군을 격퇴함으로써 유리한 국면을 이끌었다. 토치카는 2~5km마다 설치되어 장시성에만 3,000여개나 구축되었다.

 

이런 가운데 장시 소비에트에선 설립자인 마오쩌둥이 배제되고, 외래인들이 거점을 차지했다. 상하이에 두었던 중앙당 지도부가 국민군의 검거열풍에 쫓기다가 루이진(瑞金)으로 몰려온 것이다. 4차 초공 때 이미 권력에서 배제된 마오쩌둥은 5차 초공에는 더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

19341월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정부의 주석으로 선출되었지만 중앙집행위원회에선 왕따가 되었다. 위원회는 볼셰비키들이 17명의 주석단을 차지해 주요결정이 주석단에 의해 이뤄졌다. 또 볼셰비키들은 총리격인 인민위원회 주석에 장원텐(張聞天)을 지명해 마오는 실권 없는 직함만 갖게 되었다.

19347월에는 볼셰비키의 보스격인 보구는 모스크바에 가 있는 왕밍(王明)과 연락을 취하며 마오가 당내 회의에 출석하는 것마저 금했다. 그것도 모자라 당권파들은 루이전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마오를 연금시키고 말았다.

 

소련파들은 당권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국민군과의 전투에서는 연전연패했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오토 브라운의 전술이었다. 브라운은 게릴라전에서 진지전으로 전환했다. 그는 홍군을 분산시켜 대항해야 한다는 마오와 주더의 주장을 듣지 않고 한 곳에 병력을 집중 배치해 적을 맞았다. 그것은 국민군이 바라던 바였다. 오토 브라운의 진지전 전술은 한스 폰 젝트의 포위 전술에 비해 한수 아래였다. 국민당 100만 대군은 긴 시간을 두고 루이진과 징강산 거점를 토치카로 압박하며 질식시켜 나갔다.

 

1933년 푸젠성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사열하는 장제스 /위키피디아
1933년 푸젠성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사열하는 장제스 /위키피디아

 

볼셰비키 교조주의자들은 상황을 탄력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193311월 푸젠성에 주둔하던 국민당군 19로군 장성들이 장제스에 반대하며 중화공화국을 선포했다.

주모자는 천밍수(陳銘樞), 리지선(李濟深) 등인데, 이들은 대표자들을 홍군지역에 파견해 항일반장(抗日反蔣) 노선에 공동투쟁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장시 소비에트가 푸젠성과 손을 맞잡았더라면 장제스는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이유는 푸젠 반란자들이 회색분자에 지나지 않으며 국민당 정권과 전혀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장제스는 푸젠 반란을 먼저 제압하고 군대를 장시성으로 향했다.

푸젠성의 중화공화국이 붕괴하자 그동안 장제스의 공비토벌을 방관하던 광둥파 천지탕(陳濟棠), 광시파 바이충시(白崇禧)와 리쭝런(李宗仁)도 초공작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장제스가 덧셈 정치를 하는 동안에 공산당은 뺄셈 정치를 했던 것이다.

 

결과는 공산군의 패배였다. 1934년 전반기에 공산군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전했다. 마오쩌둥은 군대를 분산시켜 게릴라전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브라운이 혁명군사위원회를 장악해 유격전술을 거부하고 전면전으로 포위망을 돌파할 것을 결정했다. 당의 책임자 보구와 군사전략가 브라운은 좌경 모험주의를 밀어 붙였다.

19344월 중앙소비에트의 북쪽 관문인 광창(廣昌)이 뚤리면서 중앙 소비에트의 근거지가 위험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소금 보급이 차단되어 8월에 되면서 소금을 시체와 함께 관에 숨겨 들여오고. 소변을 졸여 보충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9월말, 그동안 사용하던 대형기계들이 파괴되었다. 주요 서류와 인쇄기등만 반출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었다. 10월이 되면서 당중앙과 홍군은 포위망을 뚤어 서쪽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참가자는 병사 85,000, 당간부 15,000명과 당지도부의 부인 등이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은 근거지에서 마지막까지 남도록 했다. 여기에는 당파싸움에서 패한 천이(陳毅)와 취추바이(瞿秋白), 마오쩌둥의 두 자녀도 포함되었다. 193411월 루이진이 국민당 수중에 떨어졌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5차 토벌에 거의 초토화되었다. 산시(陝西)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소비에트가 봉괴되고, 대도시의 조직도 와해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이라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군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는 것이 시급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Fifth encirclement campaign against the Jiangxi Soviet

나무위키, 5차 초공작전

-현대 중국사(하권)-인민의 탄생과 굴기, 이매누얼 C.Y. ,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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