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내전⑤…패전을 역이용한 마오쩌둥
제1차 국공내전⑤…패전을 역이용한 마오쩌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0.23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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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희생 치르며 탈출…준이 회의에서 마오쩌둥 권력 복귀

 

중국 공산당은 19341016일부터 1년 동안 중국 서부지역을 정처 없이 도주했다. 그들이 이동한 거리는 12,500km 정도로 추산되는데, 지구 둘레의 4분의1이 넘는다. 이렇게 험난하고 먼 길을 도망치면서도 그들은 대장정(大長征)이라고 미화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이다. 그들이 이 처절한 도주에서 살아 남았기에 오늘날 거대한 중공(中共)이 탄생할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장시의 장제스 /위키피디아
장시의 장제스 /위키피디아

 

국민당의 포위전략에 질식해 있던 1934년 어느 시점에 공산당 지도부는 극비리에 퇴각을 모색했다. 소비에트 근거지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당 총책을 맡고 있는 보구(博古)와 전략책임자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였다. 다만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 탈출을 결정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346월 팡즈민(方志敏)의 홍군 부대가 국민당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국민당군은 방어에 치중하던 홍군이 느닷없이 공격에 나선 것을 의아해 했다. 이 무렵부터 공산당이 퇴각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작전에서 공격보다 퇴각이 더 어렵다고 한다. 지도부는 철수할 집단과 후방을 지킬 무리를 분류했다. 당권경쟁에서 밀린 사람, 중상자와 장거리 이동이 어려운 환자는 후방에 배치했다. 후방부대는 주력이 안전하게 탈출하도록 목숨을 걸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후방에 남아 끝내 사망한 자 가운데 총서기까지 올랐다가 좌경모험주의자로 몰려 실각한 취추바이(瞿秋白), 마오쩌둥의 막내 동생 마오저탄(毛澤覃)도 포함되었다.

첫 퇴각일은 1016일이다. 저우언라이는 포위망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를 택했다. 저우는 광둥군벌 천지탕(陳濟棠)과 비밀 협상을 벌여 광둥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을 것, 쌍방이 교전을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포위망을 푼다는 약속을 얻어 냈다.

1016일 홍군은 소비에트를 버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표현대로 대장정의 시작이다. 그 수는 10만명을 넘었다. 홍군 주력은 국민군의 포위망을 무사히 지나 검문소 세 곳을 통과하는 것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네 번째 검문소에서 국민군은 홍군의 도주를 알게 되었다.

국민군이 홍군의 탈주를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로 공격했다. 1130일과 121일 사이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홍군은 초기이동 병력의 3분의2 정도를 잃었다. 이 교전에서 살아남은 수는 36,000명으로 추정된다. 패잔병들은 사기도 크게 떨어졌고, 보급도 차단되었다. 그들은 지도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들은 처음부터 갈 곳을 예정하지 않았다. 일단, 국민군 포위망을 뚫으면 살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도부는 우선 후난성 서부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곳엔 홍군2, 홍군6집단군이 있었고, 그들과 합류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안에 마오쩌둥이 반대했다. 장제스가 두 홍군의 합류를 저지할 것이므로, 국민군의 방어가 취약한 구이저우 방향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은 후난성으로 가자고 했지만, 그의 당 지배력은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었다. 당권에서 밀려 나 있던 마오쩌둥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홍군은 구이저우로 방향을 틀었다.

 

퇴각하는 공비들은 왜 우리가 패배했는지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보구와 브라운의 전술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되었다. 코민테른이 군사고문으로 파견한 브라운은 사실상 홍군의 지휘자처럼 행동했다. 더욱 기분 나쁜 것은 보구가 브라운의 말을 따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배척한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면서 지도부의 위신이 추락했다.

홍군 총정치부주임을 맡고 있던 왕쟈샹(王稼祥)이 마오쩌둥에게 이런 분위기를 전하며 보구와 브라운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도 치밀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1218일 구이저우(貴州)성 리핑(黎平)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3만으로 줄어 있었다. 그곳에서 정치국회의가 열렸는데, 보구가 이끄는 당 지도부와 마오쩌둥의 비주류 사이에 노선 차이가 드러났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편에 섰다.

해를 넘겨 193511, 보구와 브라운은 후난성으로 가자고 주장했으나 거절당했다. 115일 홍군은 구이저우성의 제2도시 준이(遵義)를 점령했다. 당 지도부는 우선 두파로 갈라진 노선부터 정리해야 했다. 115일에서 18일까지 당 중앙은 준이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정식 위원 18명과 2명의 옵서버가 참석했다.

 

1935년 1월 준이 회의가 열렸던 청사 /위키피디아
1935년 1월 준이 회의가 열렸던 청사 /위키피디아

 

회의가 열리자 당 책임자 보구가 먼저 정치보고를 하고, 저우언라이가 보충 발언을 했다. 곧이어 마오쩌둥이 발언을 시작했다. 마오는 보구와 브라운의 전략적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들을 좌경모험주의로 몰아 세웠다. 그들의 모험주의로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했으며 공산군이 근거지를 상실하고 붕괴의 위기에 처했다고 성토했다.

보구는 제국주의가 국민당을 일방적으로 지원한 점, 국민군의 병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패배가 불가피했다고 변명했다. 그의 변명이 옳을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유격전술을 채택했더라도 국민군의 무자비한 5차 초공을 막아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지도자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패장의 구구한 변명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브라운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담배만 벅벅 피워댔다.

준이 회의의 내용은 50년 후인 1985년에야 공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다수의 정치국원들이 마오쩌둥을 지지했다. 한때 마오의 적이었던 사람도 돌아섰다. 마오는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왕쟈샹은 물론 장원롄(張聞天),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등이 마오를 지지했다.

회의에서 당 총서기는 보구에서 장원톈으로 교체되었고,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총서기를 맡지는 않았지만 당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우선 공산당의 군사지도부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왕쟈샹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쟈샹이 지병으로 회의 참석이 어려웠고, 마오쩌둥이 군사를 지휘하고 저우언라이가 지시를 따르는 형태가 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이 공산당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당내에는 보구가 한 축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오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당 주류로 복귀한 이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덩샤오핑은 1933년 왕밍 등 국제파에 의해 마오쩌둥과 함께 추락했다가 준이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덩샤오핑은 1980년 이탈리아 기자에게 나는 평생 세 번 추락하고 세 번 일어났다”(三落三起)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추락과 재기가 이때였다.

 

준이 회의는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만들어 냈다. 국제파들이 실각하면서 코멘테른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중공은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 서서히 중국의 현실에 맞는 공산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마오주의에 물들어갔다.

준이 회의를 통해 전열을 가다듬은 홍군은 다시 출발을 했다. 그들은 막연히 서쪽으로 간다는 방향만 정하고 이동했다. 구이저우, 윈난은 중국에서도 지형이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곳을 지나야 했다. 국민당의 지배력이 약한 곳이면 일단 점령했다가 국민군이 쫓아오면 다시 도주했다. 장제스는 적비(赤匪)를 끝까지 추적해 마지막 한사람까지 소멸시키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자의 대추격전이 중국 서부에서 벌어졌다.

 


<참고자료>

Wikipedia, Zunyi Conference

Wikipedia, Long March

-현대 중국사(하권)-인민의 탄생과 굴기, 이매누얼 C.Y. ,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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