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옥저②…세골장 풍습
사라진 고대왕국 옥저②…세골장 풍습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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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때 일시적으로 신라에 귀속했으나 다시 고구려에 복속

 

옥저라는 부족국가는 두 곳으로 분류된다. 함경남도 함흥 일대를 동옥저, 함경북도 두만강 일대를 북옥저라고 했다.

옥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선 박혁거세와 동명성왕 치세에 잠시 스쳐 지나가고, ()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동천왕이 옥저로 피난갔다는 전황 기사에 언급됐을 뿐이다.

 

혁거세 53(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했습니다.” (신라본기)

동명성왕 10(기원전 28) 11,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해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고구려본기)

 

옥저가 신라(사로)에 공물을 바치며 친선외교를 희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가 동해의 무역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변한의 철을 수입하는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삼국사기>에서 옥저와 신라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옥저는 예국, 실직국과 마찬가지로 동해안 해상루트를 이용하려면 신라를 거쳐야 했다. 진흥왕 이전에 소지임금이 비열홀(함남 안변)까지 순시했다(481)는 기록이 있어 옥저와 신라 사이엔 교류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옥저의 정치체제, 생활상, 문화에 대해서는 <삼국지> 동이전에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삼국지> 동이전이 편찬된 때가 3세기 전반의 시기이므로, 고구려 대무신왕조에 호동왕자가 옥저를 멸망시켰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 후에도 옥저는 고구려에 복속하며 부족국가로서 명맥을 유지해왔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지>의 내용으로 옥저의 대강을 살펴본다.

 

위치: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 개마고원)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해서 산다.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어 천 리는 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와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호수는 5천이다.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南沃沮)에서 8백여리를 간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락국가: 대군장은 없고 읍락마다 장수(長帥)가 있다. 읍락 거수들은 스스로 삼로(三老)라 칭했다.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 끼어 궁핍했으며, 끝내 고구려에 신속됐다. 고구려는 대인들을 사자(使者)로 삼아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고 세금을 걷게 했다.

언어: 고구려와 크게 같지만, 조금 다른 것도 있다.

풍습: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오곡에 잘자라며, 밭농사가 잘된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적고 창을 다루는 것과 보병전(步戰)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고구려와 같다.

민며느리제: 여자는 열 살이 되면 결혼 허락을 받는다. 사위되는 집에서 여자를 맞이해서 클 때까지 길러서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 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 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위집으로 돌아온다.

세골장(洗骨葬): 장사지낼 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에 출입구를 하나 낸다. 새로 죽은 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다음 피부와 살이 썩으면 뼈만 추려서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한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깎는다. 죽은 자의 수와 같다. 또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안에 쌀을 넣어 곽의 입구 한쪽에 매둔다.

공물: 맥포(貊布)와 물고기, 소금과 해산물이 주요 공물이었으며, 고구려에 1천리 길을 짊어지고 가서 바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 첩으로 삼았으니, 노비나 같았다. 고구려는 옥저에서 공녀제도를 채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9년에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임금이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동해 사람이 옥저인 것 같다.

북옥저: 풍속은 동옥저와 같다. 인접한 읍루가 배를 타고 자주 노략질했으므로, 이를 두려워해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 속에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추워서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살았다.

 

신라 진흥왕 마운령·황초령 순수비 /문화재청 발간 북한문화재 해설집1
신라 진흥왕 마운령·황초령 순수비 /문화재청 발간 북한문화재 해설집1

 

옥저의 사회상은 예국의 그것과 비슷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족장들이 일반인들과 섞여 사는 등 사회분화가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옥저는 위만조선에 예속돼 있다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현도군에 속했으며, 현도군이 요동으로 쫓겨가면서 낙랑군 동부도위에 귀속됐다.

낙랑군 동부도위는 단단대령(백두대간) 동쪽을 7개 현으로 나누어 옥저도 하나의 현이 됐다. 옥저는 부조(夫租)현이었다. 동부도위의 치소(治所)는 불내성(不耐城, 함남 안변)이었고, 옥저는 하나의 현으로 불내성의 다스림을 받았다. ()은 예국과 옥저를 함께 묶어서 통치했다. 옥저와 동예는 다른 부족이지만, 규모가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낙랑군은 서기 30년에 동부도위를 없애고, 현에 있는 거수(渠帥)들을 모두 현후(縣侯)로 삼았는데,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됐다.

 

1958년 북한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무덤에서 고대의 인장이 발견됐다. 그 인장에는 부조예군(夫租薉君)’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데, 바로 옥저의 부족장(渠帥)을 의미한다. ‘부조(夫租)’<한서>(漢書) 지리지에 낙랑군에 속한 하나의 현으로 나오며,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옥저(沃沮)’로 나온다.

부조예군의 주인공은 옥저의 부족장으로,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을 분석하면 상당한 호화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한()나라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부족장이 죽으면 무덤을 자기네 직할통치구역으로 옮겨 토착세력의 저항심을 줄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지> 동이전에는 위의 관구검이 침공했을 때 고구려 동천왕이 옥저로 피신한 전황을 상세히 담고 있다.

위군의 침공으로 옥저는 잠시 낙랑군에 귀속됐지만, 곧이어 고구려가 위에 반격을 가함에 따라 고구려에 귀속됐다. 옥저는 진흥왕 때 일시적으로 신라에 편입되지만, 다시 고구려에게 지배권을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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