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내전⑦…시안사변 후 내전 종식
제1차 국공내전⑦…시안사변 후 내전 종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0.2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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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양후청의 장제스 체포…저우언라이 중재로 제2차 국공합작

 

중국 옌안(延安)은 풍요로운 곳이 아니다. 황토벌로 이어진 산지였고, 농사가 잘 되지 않는 곳이었다. 옛날부터 빈곤했던 이 농촌마을에 수만리를 이동해온 공산당이 떼로 몰려 왔다. 처음엔 마오쩌둥과 함께 생존한 8,000명이 오더니, 그후에 장궈타오(張國燾), 허룽(賀龍), 주더(朱德)가 이끄는 부대가 속속 합류했다. 원래부터 근거지를 닥았던 류즈단(劉志丹)의 부대와 합쳐 1936년말에 옌안은 3만명의 병력이 집결하는 중소도시가 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공산군이 한곳에 집결한 것은 오히려 국민당으로선 유리했다. 게다가 옌안은 공산당이 도망쳤던 쓰촨이나 티베트보다는 가까워 중앙에서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곳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국민당이 총공세를 벌인다면 소련 국경까지 도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 제압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일본군의 공세가 가팔라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만주를 집어삼킨 후에 내몽골, 화북지방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장제스의 생각은 공산당을 먼저 근절한 후에 왜적과 싸운다는 것(安內攘外)이었는데, 자칫 우물쭈물하다간 그의 구상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공산당은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북쪽에서 일본군이 당장이라도 내려올 태세였다.

장제스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일본에 대적하기 위해선 소련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소련과 연합하기 앞서 국내 공산당을 서둘러 토벌해야 했다. 장제스는 옌안에 모인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의 양후청(楊虎城)을 시안(西安)에 주둔시켜 그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장쉐량과 양후청의 군대와 내통해 서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장제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려도 전투는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장제스는 양측이 모종의 협상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을 했다.

 

시안사건 당시 공산당 소비에트 /위키피디아
시안사건 당시 공산당 소비에트 /위키피디아

 

이 무렵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중대결정을 내렸다. 19358월 제7차 코멘테른 대표대회는 각국 공산당에게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구성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해말, 옌안의 중국 공산당도 파시스트 세력인 일본에 반대하는 항일 구국전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각 대학의 항일 시위를 주도했다. 1935129일 공산당 지하당의 지휘 아래 베이징 대학에서 항일 시위가 일어났고, 텐진, 상하이, 우창,충칭, 광저우 등 전국 각지로 학생 및 시민들의 반일 시위가 확산되었다.

항일운동은 자연발생적인 운동을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함으로써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전국항일해방연맹, 인민항일동맹 등을 결성했고, 이들단체는 항일전쟁을 위해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라는 구호를 널리 유포했다.

공산당은 항일을 생존수단으로 활용했다. 국민당의 토벌을 반민족행위로 매도하고 항일공동전선을 펴자고 주장했다. 장제스의 입장에서도 공산당 토벌과 대일전이라는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장쉐량과 양후청(1936) /위키피디아
장쉐량과 양후청(1936) /위키피디아

 

이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19361212일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은 뉴스가 중국 서부 시안에서 발생했다. 장제스가 국민당 반란세력에 의해 납치된 것이다.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124일 시안에 와서 온천도시 화칭츠(華淸池)에 체류했다. 129일 시안의 학생들은 베이징 학생들의 항일시위 1주년을 기념하며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내전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주범은 장쉐량이었다. 그는 만주군벌 장쩌린(張作霖)의 장자로 아버지를 일본군의 음모로 희생당한 후 동북3성을 물려받았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동북3성을 잃고, 1933년 열하사변으로 러허(熱河)마저 일본에 빼앗긴 후 장제스 휘하에 복무하고 있었다.

장쉐량은 일본군에 한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퇴각한 군벌에 지나지 않았다. 몰락한 군벌이 그나마 체면을 살린다고 상관에 반역을 도모한 것이다. 그는 쑨밍주(孫銘九) 등 장교 10여명을 선발해 장제스 체포를 지시했다. 1212일 새벽 4, 쑨밍주는 120명의 병력을 4대의 트럭에 싣고 화칭츠의 장제스 숙소로 들이닥쳤다. 쿠데타군은 호위병과 총격전을 벌여 그들을 대부분 사살하고 장제스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장쉐량은 내전중지와 구금자 석방을 골자로 하는 8개항을 요구했다. 포로가 된 장제스는 장쉐량과의 일체 협상을 거부했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자 열강은 서로 발뺌하기 급급했다. 소련은 친일파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일본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국민당내 쿠데타의 결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 세력은 각자의 대응에 나섰다.

공산당 내에선 처음에 저주스러운 장제스를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성을 먼저 찾은 곳은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이었다. 장제스를 죽이면 내전이 벌어지고, 대일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일수 없다고 소련은 판단했다. 소련은 장제스의 석방을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에 그런 방향의 지시를 하달했다. 중공지도부도 냉정을 찾고 판단해볼 때 장제스를 잘못 처리했다간 국민당 국우파의 초강경 공세를 받아 옌안 거점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국민당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렸다. 강경파는 전 군사력을 동원해 시안을 공격하고 근처 옌안도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이 비해 온건파는 장제스의 신변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대화를 통해 사태를 수습할 것을 주장했다.

 

공산당은 당내의 일부 흥분을 가라앉히고 코민테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협상대표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내세웠다.

저우언라이는 장쉐량과 국민당 온건파, 장제스의 막후에서 협상을 벌였다. 공산당은 장쉐량과의 연대를 포기하고 장제스와의 연대를 선택했다. 저우언라이의 설득에 장쉐량은 장제스의 석방에 동의했다.

1224일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접견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교장 선생님이라 불렀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반겼다. 장제스는 저우언라이에게 "우린 적이지만 언제나 자네를 생각해왔네. 언젠가 자네와 같이 일할 날이 오길 바라네."라 했고,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원들도 장제스를 항일의 영도자로 지지한다고 했다. 장제스는 묵시적으로 공산당과의 내전을 약속했다.

다음날인 1225일 장제스는 석방되어 난징으로 돌아갔다.

 

장쉐량, 양후청, 장제스 /위키피디아
장쉐량, 양후청, 장제스 /위키피디아

 

장제스는 석방 후에 공산당이 삼민주의를 지지한다면 미래의 항일전쟁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ㄷ. 공산당 토벌은 이미 중지되었지만, 옌안 지역에 대한 봉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협상은 계속되었다. 공산당측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전선에 힘을 모으자고 제의하면서 국민당이 받아들인다면 국민당 정부에 대한 무력전복, 소비에트 해체, 토지몰수 정책 포기 등을 약속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화해를 뒤집을수도 있었으나, 번복하지는 않았다. 정치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이 정식으로 중일전쟁을 도발했다는 사실이다. 193777일 일본은 베이징의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일으켜 베이핑(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했다.

일본의 도발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를 서두르게 했다.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지 10년만에 두 당은 타협에 이르렀다. 공산당은 소비에트 정부를 해산하고, 특구로 전환했으며, 공산군을 국민군에 편입시켰다. 2차 국공합작이 시작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Xi'an Incident

나무위키, 시안 사건

-현대 중국사(하권)-인민의 탄생과 굴기, 이매누얼 C.Y. ,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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