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강화도’…쇄국과 개국의 갈림길에서
송호근의 ‘강화도’…쇄국과 개국의 갈림길에서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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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과 근대가 겹치는 조선말을 통해 현재 한국 상황에 메시지 던져

 

사회학자 송호근의 소설 시도는 매끄럽지 못한 것 같다. 그가 2017년에 쓴 장편소설 강화도(나남)는 차라리 수필 형식으로 쓰는 게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너무 포괄적으로 문제를 다뤘다. 작가는 강화도 조약, 대외 개방, 두차례 양요, 쇄국정책, 천주교 탄압 등 다양한 사건을 한데 묶으려 시도했다. 이런 사건들이 동시대에 일어나긴 했지만 주제가 지나치게 펼쳐지다 보니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천주교 탄압과 실학을 인위적으로 역으려 하다보니, 정약용의 손녀 혜련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삽입시켜 실제 인물 신헌을 산만하게 했다는 느낌이다.

 

그는 소설 강화도에서 주인공 신헌(申櫶, 1810~1888)을 이렇게 정리했다.(284)

나는 완충이다. 완충에서 홀로 스러지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밀어내고 밀고 오는 두 힘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강화도는 완충이었다. 반짝이는 한강 물이 넘실거리고 흘러가 닿은 곳. 그리움의 퇴적이 강화도였다. 조정과 촌락에서 만들어낸 모든 정의와 불의가, 시기와 관용이, 정론과 이단이 뒤섞여 흘러 퇴적들로 쌓이는 섬이 강화도였다. 나의 삶은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정의, 관용, 정론과 불의, 시기, 이단의 어느 한쪽에도 거들지 못한 허허로움으로 삼았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서양과 일본의 압력이 부딪치는 한 가운데에 신헌의 위치를 설정한 것이다.

책표지
책표지

 

송호근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쇄국과 척사론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은 신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처음 일본이 들이민 13개 조약안은 완전히 문을 열고 청나라와의 관계는 끊고 자기들이 거류민단을 파견하면 보호하라는 거였어요. 신헌은 이것을 12개조로 줄이고 이전의 조공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약간의 출구만 만들어줬습니다. 받아들이되 우리 실정에 맞게 바꾼 것, 그게 조선의 자율성을 향한 출구였죠.

오늘날 우리는 그런 출구를 만들고 있나요? 사드든 중국의 사드보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법으로 갈라져 싸우기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신헌은 누구인가 찾고 싶었습니다.”

 

그가 강화도라는 장소와 신헌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삼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고 밝혔다.

지난 겨울, 신헌의 일대기를 추적하다 그의 묘소가 강원 춘천 부근에 있다는 기록을 접했습니다. 찾고 보니 그 묘역은 제가 20년을 다니던 찻길 바로 위 능선에 있었어요. 20년 전부터 북한강 주변의 작은 농가를 집필실로 개조해 써왔는데 직선거리로는 불과 3정도였어요. 전율이었죠. 묘소에 소주를 올리고 한참 서 있었습니다.”

봄이면 강화도로 가끔 낚시를 다녔는데 어느 날 그 낚시여행이 역사기행임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점심을 먹던 자리가 함대영이 있던 중영(中營)이었고, 주차장과 화장실 자리가 열무당과 연무당 옛터였어요. 춘천도 마찬가지예요. 신헌 묘소 건너편에는 그의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 장군 묘소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설 강화도는 신헌의 일대기를 따라간다. 신헌의 한 평생은 시대의 굴곡을 타고 내면적 변화를 겪는다.

시대는 바야흐로 19세기. 서양의 프랑스와 영국, 미국, 뒤늦게 개화를 한 일본이 조선을 향해 밀려들었고, 국내 유림들은 중국을 중심으로 보는 화이사상과 서양에 나라를 열면 금수(禽獸)가 된다는 쇄국론, 유교원론주의에 빠져 있었다. 쇄국과 개방, 그 완충지대에서 신헌은 살았고, 천주교를 믿는 가상의 인물 혜련과 양적의 종교를 탄압해야 하는 자신과의 갈등을 그려냈다.

송호근은 책의 서문에서 신헌을 경계인이라고 정의했다. 스스로도 경계인임을 자처했다.

그는 봉건과 근대가 겹치는 19세기 중후반을 살았던 무장(武將)이다. 그는 봉건과 근대 사이에 선 경계인이었다. 진영논리가 대치하는 21세기 한국에서 경계인의 자리는 좁다. 나는 과거와 미래, 내부와 외부를 끊임없이 진자운동하는 사회학자로 살았다. 그 경계선 위에 올라앉아 옛것과 새것, 민족과 세계, 시세와 처지를 관찰하는 문사(文士)를 자처했다.

19세기 후반, 신헌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밀려오는 일본 함대를 몸 하나로 대작했다. 밀려오는 왜양(倭洋)과 사대부의 척사(斥邪) 사이에서 진자(振子)운동하는 신헌의 내면이 궁금했다.“

 

송호근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2016129일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그가 책을 출판한 날짜는 201745,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처리하고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다.

그는 19세기말 강화도를 주제로 하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드의 경우 중국이 반발하니 무조건 받기도 그렇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고집하니 안 받을 수도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불확실합니다. 어떻게 하면 출구가 있는 방식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념 대립으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도자는 촛불과 태극기, 둘 다 봐야 합니다. 촛불혁명뿐만 아니라 태극기의 충정도 수용해야 화합할 수 있어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없애려면 가교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한쪽만 편들면 광장이 전장(戰場)으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예요.”

 

/책 ‘강화도’ 내용중
/책 ‘강화도’ 내용중

 

저자 송호근

사회학자이자 칼럼니스트. 1956년 경북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춘천 한림대 교수를 거쳐 1994년부터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학자가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그는 서문에서 정리했다.

나는 논리 밖으로 자주 외촐해 소설과 밀회했다. 논리는 세상을 재단할 뿐 공감하려 하지 않았다. 세상은 감성의 바다에 떠 다녔다. 만얼걸의 인간과 사회가 거기 있었다. 오래 미뤄왔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스물일곱이던 1983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을 출간한 이래 지금까지 단독 저서만 26권을 썼다. 사회학 관련서는 물론 에세이, 칼럼집, 산업리포트 등 분야도 다양하다. 올해 가 보지 않은 길』 『강화도』 『촛불의 시간등 세 권의 책을 냈다. 스스로 꼽는 대표저서는 인민의 탄생(2011)시민의 탄생(2013).

 

주인공 신헌(申櫶, 1810~ 1884)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1811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부사 신의직(申義直)의 아들로 출생.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국빈(國賓). 호 위당(威堂). 초명 관호(觀浩). 시호 장숙(壯肅)이다.

어려서 당대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했다.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했다.

민보집설(民堡輯說), 융서촬요(戎書撮要)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하고,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을 배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저술을 쓰기도 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제작에 조력했고,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1843년 전라도우수사 시절에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농법에 관한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1827(순조 27) 할아버지 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했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 녹도(鹿島)에 유배되었다. 1853년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했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후 어영대장·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덕진(德津초지(草芝) 3()에 포대를 구축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운요오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돼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개항시켰다. 이때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沁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이 송호근의 강화도집필에 근간이 됐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恩休亭)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Shufeldt, R. W.)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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