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의 지주 구마모토 리헤이
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의 지주 구마모토 리헤이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2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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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금융자본 앞세워 전북 5개군에 1천만평 보유…고율의 소작료로 수탈

 

일제강점기에 재벌(財閥군벌(軍閥)과 함께 3(三閥)로 꼽히는 농벌(農閥)이 있었다. 수천 정보의 농지를 보유하고 수많은 조선인 소작인을 거느리며 부를 축적한 일본 대농장주를 일컫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읍을 중심으로 전북 일대 5개군에서 거대한 토지를 집적한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1879~1968).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전경 /이하 사진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발간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Ⅰ’에서 캡쳐.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전경 /이하 사진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발간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Ⅰ’에서 캡쳐.

 

구마모토는 1879년에 나가사키현(長崎縣)에서 태어났다.

구마모토 리헤이
구마모토 리헤이

그는 게이오대학 전신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이재과(理財科)에 재학하던 중 조선으로 시찰을 와 각지를 여행했다. 그는 호남 지역에서 농지개발의 유망성을 간파했다. 여행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간 그는 조선 방문기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에 게재했다.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의 모토야마(本山) 사장이 기사를 읽고 구마모토를 초대해 조선의 실정과 농지개발의 유망성을 청취했다. 그런 후 모토야마 사장은 출자금을 내놓고,구마모토에게 조선내 농지매입에 착수할 것과 그 관리권을 맡기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1902, 그는 게이오 동기생인 마스토미 야스자에몬(傑富安左衛門)의 농장에 지배인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1년 후인 1903년 구마모토는 전라북도 옥구군 박면 내사리와 태인군 화호리 두 곳에 농장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30년이 지난 1932년 전북 일대에 약 3,500 정보의 대토지를 소유하는 농업 왕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정보(町步)는 일제가 우리 국토를 측량한후 사용한 토지면적 단위로, 3,000 평에 해당했다. 따라서 구마모토가 전성기에 보유한 3,500 정보는 1,000만 평에 해당한다. 이는 3,300으로, 여의도 면적(2.9)10배를 넘는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토지를 획득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였다. 대자본가의 경우 조선인에게서 직접 토지를 구입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토지를 저당 잡아 고리대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는 사람의 토지를 유질(流質) 처분하는 경우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후자, 즉 저당유질을 이용홰 조선인들의 토지를 빼앗다시피 했다. 당시 대도시는 물론 지방 소도시까지 일본 거류민의 80~90%가 대금업을 했다고 하니, 부채에 쪼들린 조선인들이 대금을 깊지 못할 경우 토지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토지를 노린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조선 토지의 지가가 일본의 10분의1 수준으로 저렴했다. 비슷한 수확을 얻는다면 일본 농지보다 조선의 농지를 사는게 수익률이 높았다. 둘째, 구한말 조선조정의 재정악화, 봉건적 수탈로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되는 과정에 있었고, 이 토지를 매수할 자본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셋째, 조선 지방관의 부패도 한 몫을 했다. 부패한 지방관은 지주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금전을 갈취했고, 그 과정에서 농민들이 일본인에게 토지를 급매했다.

본국에서 가난한 일본인이라도 조선에 이민와, 식산은행 등에서 저리로 융자를 받아 고금리로 조선인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돈을 갚지 못한 조선인의 토지를 강제로 뺏는 수법을 썼다. 일본이 금융자본을 앞세워 조선의 토지를 수탈한 것이다.

 

구마모토 농장의 전경.
구마모토 농장의 전경.

 

구마모토의 토지매입에 분수령이 된 것은 러일전쟁이었다. 1904년 일본 재계는 일본인들의 조선 토지 메입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구마모토는 처가인 야스자에몬 가의 덕을 크게 보았다. 당시 나가사키 출신의 마츠나가 야스자에몬(松永安左衛門)일본의 전력왕으로 불리며, 기업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구마모토는 처가인 야스자에몬가의 도움으로 일본 재계의 투자를 받아 본격적인 토지매수사업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구마모토는 1910년에는 1,500 정보를 경영했는데, 이중 자신의 소유분은 225 정보였다. 1931년 말에는 오쿠라 재벌의 농장을 사들여 약 3,500정보를 소유하는 대지주로 성장했다. 19352월엔 주식회사 구마모토농장을 설립했다.

 

구마모토 농장 사음회(舍音會). 농장관리인들의 모임이다.
구마모토 농장 사음회(舍音會). 농장관리인들의 모임이다.

 

구마모토(熊本) 농장은 전라북도 김제, 부안, 옥구, 정읍, 전주 등 5개 군 26개 면에 걸쳐 3,000 정보가 넘는 농장을 관리했다. 구마모토는 개정본장(開井本長), 지경지장(地境支場), 대야지장(大野支場), 화호지장(禾湖支場), 전주분장(全州分場)5개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직원 50여 명을 두어 관리했다. 그 중 개정본장, 지경지장, 대야지장, 화호지장 등은 군산항에 이르는 철도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어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구마모토는 전라북도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지주였고, 일제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를 제외하고 전북지역에서 최대의 개인 지주가 되었다.

 

구마모토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 도쿄에 거주하면서 주주총회 등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만 조선에 들렀다. 그는 1년에 3~4차례만 조선에 오고, 평소에는 시바야마(柴山鼎)를 지배인으로 삼아 관리하게 했다. 지배인은 구마모토에게 일보, 월보 등으로 현황을 보고했고, 주요현안은 구마모토의 지시를 받아 운영했다.

구마모토 농장은 개정본장의 본장장(本場長)과 지장장(支場長), 분장장(分場長)으로 관리자를 두었고, 그 아래 직급별로 일본인 직원과 조선인 직원, 사음, 소작인 등의 순서로 피라미드 서열 체계를 두고 관리했다.

전성기 시절인 1936년엔 49명의 직원에 67명의 사음(舍音)을 두고, 소작인 2,687명을 관리했다. 사음은 지주를 대신해서 소작인을 관리하는 마름을 말한다.

 

구마모토농장 관리인 가옥.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의 모습을 띠고 있다.
구마모토농장 관리인 가옥.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의 모습을 띠고 있다.

 

구마모토 농장의 직원은 최고의 늉업전문가였다. 1942년 구마모토농장의 이사였던 스즈키(鈴木慶光)는 일본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평북 종묘장 기술자, 총독부 식산국 기술자,, 함경북도를 거친 농정 관료 출신이었다. 니시무라(西村英三) 이사도 평안북도, 충청북도 등지에서 기술직 공무원을 거첬고, 무라카미 코이치(村上幸一) 이사도 충남 홍성군과 전북 고창, 임실의 기술직 공무원 출신이었다.

 

구마모토 농장은 다른 농장에 비해 소작료를 많이 받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1938년 전북 경찰부장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료는 평당 1.25근으로, 다른 농장의 소작료가 평당 1.05근에 비해 고율이었다. 김제군 부량면 신용리 일대의 소작료 조사에 따르면, 구마모토 농장이 1평당 벼 1.35, 동양척식회사가 1.25, I농장이 1.15, A농장이 1.30, MI농장이 1.10, MA농장이 1.20근으로 구마모토 농장이 가장 고율의 소작료를 걷고 있었다.

구마모토 농장은 60~70%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 수취는 물론이고 대부 비료에서도 차익을 챙기고, 농장의 지시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구타까지 하는 등 폭압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수탈이 심했기 때문에 소작쟁의도 빈번했다.

1933년엔 흉년이 들어 수확량이 예년에 비해 50%나 감소했는데도 농장 측이 소작료를 전년보다 30%나 인상, 통고했다. 이에 전북 옥구군 옥산면 강북리 구마모토 농장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농장측은 재해 또는 부득이한 사정을 인정하고 소작료 인하조치를 취했다.

1934년에는 김제군 용북면 화호리 농장에서 소작료를 10~20% 인상하면서 소작료 불납운동이 일어났다. 농장측은 소작료 일부 반환조치를 통해 사태를 수습했다.

 

1939년에 세워진 화호자혜진료소의 모습. 구마모토농장 소작인의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세워진의료기관이다.
1939년에 세워진 화호자혜진료소의 모습. 구마모토농장 소작인의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세워진 의료기관이다.

 

구마모토는 조선 소작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장학금 지급, 의료 혜택 등을 지원하면서 무마하려고 했다.

구마모토는 19354월에 정읍 화호리에 자혜진료소의 문을 열었다. 진료소에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이영춘(李永春, 1903~1980)이 내려와 진료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근대 의료 혜택을 받게 된 소작인들과 가족들은 연일 진료소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의 농지는 일본의 패전과 함께 몰수되었다. 그는 90살이 되던 1968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참고자료>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발간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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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영 2022-01-11 14:25:49
개새ㅣㄲ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