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숲에서 느끼는 미움과 원망의 덧없음
정릉 숲에서 느끼는 미움과 원망의 덧없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0.3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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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첫 왕비 신덕왕후의 무덤…이방원이 미움으로 사대문 밖으로 이장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은 조선 왕실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이다.

신덕왕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에겐 첫 번째 왕비이고, 자연인 이성계에겐 두 번째 부인이다. 이 복잡한 관계로 인해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그녀의 무덤이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녀의 원래 무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는데, 지금의 정릉은 태종 때 옮겨진 것이다. 지금 중구 정동과 성북구 정릉은 신덕왕후 무덤으로 인해 지어진 지명이다.

신덕왕후의 성은 강()씨이고,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조선의 여인은 왕비라 하더라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신덕왕후 강씨는 고려말 권문세족인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었다. 동북면(함경남도) 출신의 무신 이성계가 중앙에 진출해 권세가 있는 집안을 처가로 삼기 위해 두 번째 부인을 얻은 것이다.

 

정릉 /박차영
정릉 /박차영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이 있었다. 본관은 함경남도 안변(安邊). 증문하시랑찬성사 한유(韓裕)의 증손으로, 이성계의 고향 여인이다. 아들 이방과가 왕위에 올라 정종이 되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지만, 살아 생전엔 그저 부인이었을 뿐이다. 첫째 부인은 남편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1391(공양왕3)55세의 세상을 떠났다. 한씨는 후에 왕이 된 정종(이방과)과 태종(이방원)을 비롯해 이방우, 이방의, 이방간, 이방연 등 6남과 경신·경선 두 공주를 낳았다.

 

정릉 /박차영
정릉 /박차영

 

두 번째 부인 강씨는 이성계가 출세를 하기 위해 얻은 서울(개경) 출신이다. 이성계가 강씨와 결혼했을 당시에 첫 번째 부인 한씨는 살아 있었다. 이성계는 고향에 향처로 한씨를 두고 서울에 경처로 강씨를 두었던 것이다. 둘째 부인 강씨는 이성계보다 21살 어렸고, 장남 이방우보다 3, 둘째 며느리(정종 왕비) 정안왕후보다 한 살이 어렸다.

강씨는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이성계가 위험에 빠졌을 때 여러차례 구했고, 조선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첫째부인 한씨는 조선이 개국 직전에 죽어 왕비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비해 강씨는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자 곧바로 현비(顯妃)에 책봉되어 왕후가 되었다. 강씨는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신덕왕후는 정도전과 손잡고 자기가 낳은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첫째 부인 한씨의 소생. 특히 야심에 가득찬 방원과 갈등이 깊어 졌다.

1396년 신덕왕후는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되어 40세의 젊은 나이에 화병으로 사망했다. 이성계는 강씨의 죽음을 슬퍼해 궁궐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고 정릉이라고 했다. 지금의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지리다. 태조는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향차를 바치게 하고, 능에 제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 들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후인 1398년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씨 소생 두 아들 방번, 방석, 반대파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했다. 이에 이성계는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고,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넷째 형 방간을 죽이고 1400년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이성계는 1408년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분풀이를 시작한다. 그는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 무덤을 파헤쳐 도성 밖으로 이장하도록 했다. 새로 이장된 곳이 지금의 정릉이다. 또 무덤의 봉분을 없애고 평지를 만들어 흔적이 남지 않도록 했다. 신덕왕후의 머덤에 있던 석물은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게 해 그 위를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했다. 이 석물은 후에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 발견되었다. 또 무덤에 있던 법당(흥천사)을 헐어 버렸다. 게다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다.

신덕왕후는 현종 10(1669)에 왕비로 복위되었다. 260년이나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거의 폐묘나 다름덦었던 정릉도 그때 왕릉으로서의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정릉의 단풍 /박차영
정릉의 단풍 /박차영

 

정릉은 숲이 아름답다. 지금 이시간, 정릉엔 단풍이 곱게 내렸다. 태조 이방원은 계모를 그리 미워하고 무덤마저 허물어 멀리 옮겼지만, 정릉의 가을은 그 원한이 무색하게 아름답기만 하다. 정릉의 소나무와 참나무는 인간의 미움과 원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가르쳐 준다.

 

흥천사 /박차영
흥천사 /박차영

 

정릉에서 언덕을 넘어 돈암동 쪽에 흥천사(興天寺)가 있다. 흥천사는 1397년 태조가 신덕왕후 무덤을 지키는 능침사찰로 창건,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태종이 즉위하며 흥천사도 부침했다. 1403(태종3)에 태종은 이 절의 노비와 밭을 축소했고, 1408년에는 조계종에서 화엄종에 귀속시켰다. 1510년 유생들의 방화로 절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신덕왕후가 복위하고 정릉이 복원된 후인 1797, 흥천사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정릉의 능침사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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