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은 지금 가을공화국…동남아인들로 북적
남이섬은 지금 가을공화국…동남아인들로 북적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01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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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나라 개념 도입, 관광지로 성공…한은 총재 역임한 민병도씨가 개척

 

남이(南怡)장군은 27세의 어린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으나, 수구세력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죄로 처형당한 한 많은 조선의 무장이었다. 그는 죽어 어디에 묻힌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경기도 화성시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하나, 그것이 진짜 묘인지 확실치 않다. 또 다른 곳, 북한강변 강원도 쪽에 돌무지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남이장군의 묘라는 전설이 내려 왔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조선시대에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역모죄로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긴 남이장군은 살아 생전에 어떤 나라를 원했을까. 그가 현대에 나타난다면 어떤 세상을 그럈을까. 이런 상상이 만들어 낸 관광단지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南山面) 방하리(芳荷里)에 있는 남이섬이다.

 

가평 선착장에서 출국 /박차영
가평 선착장에서 출국 /박차영

 

남이섬은 200631일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 개념의 나미나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나미나라의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나라를 세웁니다. 노래의 섬 남이섬에 동화의 나라를 세웁니다. 同化되고 同和되어 童話를 쓰고 童畫를 그리며 動畫처럼 살아가는 동화세계를 남이섬에 만듭니다.”

마이크로네이션은 정식국가는 아니다. 일종의 가상의 나라다. 삼일절을 기해 독립을 선포했다는 것도 이채롭다. 행정부는 주식회사 남이섬이다. 통치수반은 사장.

이 나라의 세입은 관광수입이다. 연간 330명이 찾고, 이중 130만명이 120여개국에서 온 외국인이다.

 

승선 /박차영
승선 /박차영

 

남이섬은 행정구역 상으로 독특하다. 강원도 춘천에 속하는 섬인데, 남이섬으로 가는 배의 선착장은 경기도 가평에 있다. 강원도가 춘천시 쪽에서 출발하는 선착장을 만들려고 시도했지 환경적 문제로 인해 제지당했다고 한다. 섬과 육지는 지척의 거리인데도 다리가 놓여 있지 않고 배로 가야한다. 배로 5분거리다.

경기도 가평에서 출입국관리소가 설치되어 있다. 배를 타고 출국해서 나미나라 공화국에 도착한다. 섬은 독립공화국이다. 독자적인 화폐가 있고, 여권을 발행하며, 우표를 판다.

2018720, 대한민국 국군으로부터 퇴역한 M48 패튼 전차 한 대를 인수받았다. 이 관광용 탱크가 나미나라를 수호하는 무기다.

 

나미나라 입국 /박차영
나미나라 입국 /박차영

 

우리는 일요일인 1031일 오전에 나미나라에 입국했다. 유람선엔 외국인이 절반쯤 탔다. 주로 동남아인들이 많았다. 아직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풀리지 않은 상태라,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과 그 가족인 것 같았다. 동남아시아엔 가을이 없으므로, 그들에겐 남이섬이 단풍관광의 명소일 것이다. 히잡을 쓴 여성이 많은 것을 보면 말레이시아 또는 인도네시아 출신들이 많이 온 것 같다.

 

메타콰이어길 /박차영
메타콰이어길 /박차영

 

남이섬은 바로 북쪽 상류에 있는 자라섬과 크게 대조된다. 남이섬은 강원도인데 비해 자라섬은 경기도다. 남이섬은 민간소유인데, 자라섬은 공공(가평군) 소유다. 남이섬은 단일 섬인데 비해 자라섬은 크게 다섯 개로 나눠져 있다. 남이섬은 일찍부터 관광지로 개발된 반면에 자라섬은 오랫동안 환경규제에 묶여 있었다.

이런 차이점들이 경기도가 강원도의 남이섬을 질투한 이유다. 김문수 경기지사 시절에 남이섬은 광광지로 잘 개발되었는데, 자라섬은 그저 늪지대로 남아 있는 이유를 연구했다. 그 차이는 규제였다. 그후 자라섬에 이것저것 풀어 재즈페스티벌도 열고 했다. 그후 자라섬도 이젠 큰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두 섬이 경쟁체제로 간 것은 반가운 일이라 할수 있다.

 

남이섬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강원도에 붙어 있는 돌무더기 하천 부지에 불과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물길이 터져 일시적으로 섬이 되었다. 일제가 1944년 청평댐을 준공한 후에 남이섬은 영구히 섬으로 틸비꿈했다. 남이장군 무덤이 있었다는 전설을 활용해 섬의 이름을 남이섬이라고 불렸다.

해방후 한국은행 제7대 총재를 역임한 민병도(閔丙燾)씨가 그동안 급여와 퇴직금에서 모은 돈으로 1965년 남이섬을 인수했다. 민병도가 남이섬을 샀을 때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골의 황무지였다. 당시 서울의 강남 개발이 논의되던 시기에 주변 사람들은 강남 땅 투자를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뿌리치고 푸른 동산 맑은 강은 우리의 재산, 성심껏 다듬어서 후손에게 물려주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세워 남이섬에 수천 그루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1966년 남이섬을 건전한 국민관광지로 만들어 달라는 정부의 권유에 따라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했다. 그때 심은 나무들이 지금 울창하게 자라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970년대와 1980년대 강변가요제가 열렸고 TV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내외국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겨울연가 덕분에 메타세쿼이아길, 은행나무길, 벗길, 자작나무길, 이슬길 등이 유명해 졌다.

 

남이장군 추모비와 가묘 /박차영
남이장군 추모비와 가묘 /박차영

 

남이섬 선착장에 내리면 남이장군 추모비가 있다. 나미나라측에서 만든 추모비, 즉 가묘다.

배에서 내려 섬으로 들어서면 양편으로 늘어선 잣나무들이 길을 안내하고, 겨울연가의 주인공들이 걸었던 메타세쿼이아 길은 이국적인 멋을 풍긴다. 중앙광장의 은행나무 길엔 동남아 인들이 가을을 즐기기 위해 사진 촬영에 분주하다. 강변을 따라 뻗어 있는 자작나무 길과 갈대 숲길은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로 북적거린다.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갤러리와 박물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방까지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어 남이섬으로의 여행은 가을 낮처럼 짧기만 했다.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남이섬 이모저모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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